경주 남산지킴이 김구석.임희숙 부부
“남산연구솝니더. 뭣을 도와드릴까예?”
“여기요, 저…저… 칠불암 가는 과수원 앞인데… 걸어도 걸어도 험한 산길만 나와요.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어쩌죠?!”
“아, 예. 45분은 족히 걸어나오셔야 합니더. 안심하시고 산길따라 죽 나오면 절벽 평면에 삼존불과 네분의 부처님이 계실낍니더. 거기가 칠불암이니 걱정마이소 마.”
40개의 등성이와 골짜기 180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경주 남산의 ‘인간이정표’ 김구석(51 ,법명 문수)씨가 남산지킴이로 산지 어느덧 20여년. 경주남산연구소 대표인 그는, 주말이면 무료로 남산안내를 도맡는가하면,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남산안내 미니지도를 만들어 산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등 남산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자다.
서라벌 남쪽에 우뚝 솟은 금오산 자락에서 태어난 그에게, 남산은 이제 지긋할 때도 됐건만, 그는 스스로 남산에 미쳤다고 말한다. 남편의 지독한 남산사랑을 질투하긴 커녕 부인 임희숙(47, 법명 자혜)씨도, 작년 서라벌대 문화재해설과에 입학, 남산에 빠져들고 있다. 지난 13일 남산 기슭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남산 안내에 여념없는 이들 부부를, 경주시내로 끌어내려 겨우 만났다.
미련없이 공직 버리고 관광객 가이드 자청
포교 제대로 하려고 불교미술사 공부 매진
1966년 경주불교학생회에 입문한 김구석.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는 처음으로 남산땅을 밟았다. “와따이~ 부처님이 와이리 많노, 임마야 여도 있고 여도 있다 아이가~” 친구들끼리 내기를 걸고 부처님을 찾아다녔다. 그 재미에 아이는 틈만나면 남산을 밥먹듯 오르내렸다. 볼수록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띄고, 얼굴이 상했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갔거나 심지어 얼굴이 없는 부처님까지 만나면서 아이는 소년으로 성장했다. “1969년 봄, 불교학생회에서 처음으로 남산 야외법회를 봉행했다요. 남산이 쩌렁쩌렁 울리게 목탁을 치면서 반야심경을 읊을 적엔 영문도 모를 눈물까지 났다 아닝교.”
경주고 시절에도 그는 돌산 남산을 쉼없이 헤맸다. 역사와 전설이 서린 산자락마다 절터만도 130여곳이요, 석불과 마애불은 100여기가 넘었다. 청년으로 성장한 소년은 이제 마애관음입상의 보조개까지 알아채고, 해돋이 해넘이에 부처님의 미소가 달라지는 것도 감지했다. 얼굴이 네모나고 볼살이 유난히 통통한 불상, 선이 거칠고 억세게 조각된 마애여래대좌불, 머리 뒷부분에 바위를 투박하게 쪼갠 흔적이 뚜렷한 석불, 인자한 동네 할머니와 같은 정감어린 보살, 유머가 풍부하여 협시보살을 수줍게 만드는 마애불 등 그많은 부처님 중 같은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신라인들에겐 바위에도 풀밭에도 나무 위에도 부처님이 존재했었다는 느낌까지 생겼다.
대학생이 돼서도, 남산을 잊지 못했다. 진주에서 대학생활을 하느라, 남산 오르기가 쉽지 않았지만, 불교학생회 도반들과 남산순례를 하고, 방학때면 산길을 개척하고, 남몰래 마애불 주변을 청소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 됐다. 울산시청 산림과에서 시작해 경주 사적공원관리소 사업과까지 18년 동안 공직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사랑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가급 카메라까지 동원해서 슬라이드 필름을 축적해서 틈틈이 동료들에게 남산을 소개시켜주는가하면, 남산을 직접 안내하는 ‘남산도우미’로 활약, 열정은 더욱 달아올랐다.
“직장에서 아예 ‘남산도사’가 되어부렸지요. 서울서 손님이라도 오면 나를 찾더라고. 남산을 처음 오르는 사람들과 남산 한바퀴 휘휘 돌면서 내 몸속 구석구석 피와 살이나 마찬가지인 부처님의 전설과 역사, 표정과 기분까지 다 토해내불면, 시쳇말로 뿅 가버린다 아인교.” 사무실에 틀어박혀 볼펜을 굴리면서 서류종이를 끄적이는 시간보다, 남산에 올라서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혈기창창’해지는 그다.
당시 김 씨의 ‘산사랑’에 홀딱 반해버린 여자가 있었다. 험한 산타기는 딱 질색이었던 새침떼기 서울처녀는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산사내가 합류했던 답사길에 동참하면서 눈이 맞았다. “강화도 보문사를 다녀오는 길에 송충이를 내게 던지는 거예요. 간이 철렁하도록 놀라 자빠질뻔했는데,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더라구요.” 부인 임 씨의 웃음섞은 회고에 김 씨도 끼어든다. “그때 니 내품에 안겼제이. 니 괜히 무서운 척 한기제이. 내 다 알고 있다 마.” 시골생활은 한번도 해본적 없는 임 씨는 1981년 결혼하자마자 아무 망설임없이 남편따라 서울을 떠났다. 처음엔 울산서 살다가 경주로 온지도 20여년이 다 돼간다. 말끝마다 경주방언도 새어나온다.
결혼 후에도 남산에 빠져 산 김 씨는 급기야 1984년 그와 같이 남산을 사랑하는 지인 몇몇하고 ‘남산사랑모임’을 만들었다. “김구석이 남산 구석구석 돌아다님서 남산 사랑하는 마음 그대로 지키고 보여주는 게 남산사랑모임이라 아닙니꺼?” 30년이 넘도록 쉼없이 남산 ‘현장학습’에만 몰입해온 그는 1997년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입학했다. 마흔 훌쩍 넘어 시작한 공부가 쉽지 않았지만 그는 머리를 싸매며 밤을 새워 불교미술공부에 매진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서울과 경주를 오갔던 그는 결국 1999년 공무원직을 미련없이 던지고, 미술사 전공을 위해 석사과정에 올랐다.
그 무렵 본격적으로 남산 연구를 위해 ‘경주남산연구소’를 열었다. “우리 마누라요? 남편 가는길에 어데 가타부타 한대요? 고마 잘했습니더 해야제.” 겉으론 그래도 속으론 내심 미안한 표정으로 지긋이 쳐다본다. 남편따라 문화해설사 공부에 나선 부인 임 씨에게 남편점수를 물었다. “음…우리 낭군님은 처자식 묵고 사는 것 보다는 자기 좋은 것만 죽도록 하고 사니, 몸 하나는 건강할 낍니더.(웃음) 그래 저래 빼고 나면 80점은 될끼라예~”
매우 높은 점수를 받고도 “20점은 와 뺀나?” 하며 토닥거리는 모습에서 아직도 ‘깨를 볶는 듯’한 애정이 묻어난다. 부인은 또 얼마전 남산 중턱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를 얘기했다. 티코를 타고 차가 다니는 산길을 타다가 오르막길에서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죽을 뻔했다는 것이다. 차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정작 임 씨는 작은 부상도 없었다면서 “돌부처님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며 소녀같이 수줍어했다.
“우리 부부가 돈으로만 따지면서 살기보다 마음을 비우고 부처님 성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다보니 선업이 되어 복근이 오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 신바람에 콧노래가 절로 납니다.” “뭐라카노? 내가 그런 댓가 바라지 말랐제~ 기냥 하는기제, 니는 뭣이 그리 바라는게 많노? 그렇게 바라면서 하려면 당장 때려치라 마!” 티격태격 김 씨 부부는 오늘도 더운 선풍기 쐬ㅇ쐬ㅇ 돌아가는 사무실에 마주앉아 내일 일정을 맞춘다. “니가 여기 가라 마?” “싫다 아닌교. 내가 좋아하는 부처님 있는데로 갈랍니더?…”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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