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그룹 전성희 전문비서
올해 62세가 된 전성희(全聖姬)씨는 대성그룹 김영대 회장의 비서다. 두 아이의 엄마이던 서른일곱에 여비서의 길로 접어들어 환갑이 넘도록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벌써 25년째다. 회장실을 처음 방문하는 누구나 두 번 놀란다. 20대 젊은 여자로 기억되는 낭랑한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녀라는 점과, 눈앞에서 봐도 ‘할머니 비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센스만점에 발랄함, 수줍음 타는 소녀다움까지 겸비한 외모 때문이다. 지난 5월25일 오후 서울 인사동 대성그룹 본사 7층 회장실 앞. 그녀가 한국 불교학의 세계화를 주도해온 고(故) 심재룡 교수(서울대)의 부인이라는 사실에 세 번째 놀란 순간이다.
심재룡 불교학자 남편 통해
부처님 만나게 돼 행복해요
“아빠(심 교수) 없이 어떻게 제 삶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세상물정 모르고 공부밖에 할줄 아는게 없었던 제게 아빠는 삶의 행복과 보람, 아름다움과 희망을 가르쳐주고 멀리 떠났답니다. 아~ 지금도 너무 그립고 아직도 많이 사랑해요….”
짧은 커트머리, 사무적인 정장차림에 곱게 화장을 한 그녀는 환한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을 떠올리며 눈물부터 훔쳤다. 투병생활 13개월 만에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남편을 벌써 완전히 잊었다면 거짓말이다. 병마와 싸우다 끝내 눈감은 남편보다, 그녀에게 더욱 각인돼 있는 추억은 발병사실을 알기 다섯 달 전, 2003년 3월 하와이서 보낸 ‘회갑여행’ 때다. 1969년 결혼 후 일주일 만에 미국으로 먼저 유학을 떠난 남편과 헤어져 지내다가 5개월 후에 하와이에서 만나 10년 동안 유학생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았던 ‘제 2의 고향’이 바로 하와이다. 20여년 만에 하와이를 다시 찾은 ‘노부부’는 여행길에서 다짐했다. “이제 어려운 시절 다 끝났고 우리 아들딸 잘 자라줬으니, 남은 삶은 베풀면서 삽시다. 우리처럼 어렵게 공부하는 고학생들 돕고, 힘든 이웃들과 더불어 살며 편안하게 늙어갑시다.” 귀국하고 몇 달 뒤, 평생 병원출입 한번 없었던 건강한 남편이지만 나이를 핑계 삼아 부부는 건강검진을 했다. 일주일 만에 나온 검사결과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남편은 백혈병 말기로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다는 판정이었다.
“남편의 몸속에 지독한 병균들이 몰려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고 하더군요. 나쁜 균을 죽이고 또 죽여도 몇 만 몇 십 만 배로 증식하는 데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초기엔 병원에서도 희망이 있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재발은 멈추지 않았고 일곱 번이나 입원을 반복하면서 정확하게 228일간 병실생활을 하다 결국 떠나셨습니다.” 전 씨와 심 교수는 주변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고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언제 어디를 가든지 늘 함께 다녔고, 그럴 때는 누가 보든 말든 손을 꼭 잡고 다닐 정도로 부부금술이 좋았다. 주변의 친구들은 ‘너무 사이가 좋아서 갈라놓은 것’이라며 농담도 하지만 그런 농담에도 아직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다.
심 교수와 전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반장과 부반장으로 만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소식이 끊겼던 두 사람은 대학교에 진학해 전 씨의 소식이 궁금했던 심 교수가 수소문해서 이화여대 약대에 입학한 것을 알고 연락을 취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심 교수가 공부할 때 전 씨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자 심 교수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비서를 그만둬라. 내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줬으니 나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자칭 ‘할머니 비서’인 그가 비서업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하와이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만 받고 돌아오면 교수자리는 거저 생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남편이 시간강사를 해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어요, 방학 때가 되면 쥐꼬리만한 강의료마저 끊겨서 제가 돈을 벌어야 되는 형편이었거든요. 신촌 세브란스 병원의 약국에서 약사를 뽑는다기에 이력서를 넣고 취직을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의 친구인 김영대 회장이 ‘처녀들은 남자가 생기거나 결혼을 하면 금방 회사를 그만둔다’며 ‘아줌마라도 좋으니 도망가지 않고 진득하게 일할 수 있는 비서를 소개시켜 달라’ 했던 모양이에요.” 심 교수는 김 회장의 부탁을 받고 “우리 집사람이 어떻겠느냐”며 추천을 했다. 그는 비서직에 대한 매력이나 사명감보다는 취직하고자 하는 약국보다 솔직히 월급이 훨씬 많다는 점에 이끌려 입사했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힘들었던 업무가 차츰 재미있고 중요한 업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서는 단순히 CEO의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사장을 사장답게 회장을 회장답게 만들어주는 좋은 파트너입니다. GE 전 잭 웰치 회장도 로잔 바도스키라는 좋은 비서를 얻어 훌륭한 CEO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또 일반 사람들이 비서 하면 연상되는 편견부터 경계했다. 차(茶) 심부름이나 하고 스케줄이나 잡아주는 보조역할 정도로만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스케줄 관리와 차 대접 같은 단순 보조업무 못지않게 자신의 CEO가 최고가 되도록 경영 보좌 역할을 하는 데도 상당한 무게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녀는 비서로 일한지 13년째 되던 1992년에 캐나다 토론토대학에 교환교수로 가게 된 심 교수를 따라 캐나다로 갔다. 고등학교를 전교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인 그녀는 캐나다에 있는 동안에도 고등학교 3학년 영어 이수과정에 등록하고 공부할 만큼 배움에 열정적이다. 배움에는 나이를 들먹일 이유가 없다는 게 그의 생활신조다. 2년간 캐나다에 있은 뒤, 김영대 회장의 재입사 권유에 귀국 일주일 만에 그녀는 다시 대성그룹 비서실로 출근했다. 당시 대성그룹이 대성셀틱보일러 등 외국기업과 합작회사를 설립할 때는 그녀가 직접 바이어를 만나 협상도 체결할 정도였다. 지금도 그녀는 비서를 하면서 틈틈이 영어는 물론 중국어 불어 공부에도 열심이다. 관악구 신림동의 집에서 새벽 5시40분에 출발하면 회사가 있는 종로구 인사동에 6시10분이면 도착해서 외국어 공부를 한다. ‘차가 막히지 않아 좋고, 공부시간을 벌어 좋다’는 단순한 이유지만, 이것이 그녀가 25년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강원도 문막에는 남편과 남은 삶을 회향하기 위해 2년 전에 마련해둔 ‘평안학사’가 있다. 불교학을 공부하는 남편의 제자들과 함께 세미나도 열 수 있는 볕 좋고 공기 맑은 곳이다. 생전에 평안학사를 너무 좋아했던 남편을 기리며, 그곳에 남편을 묻었다. 지난해 12월 49재를 올리던 날,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되뇌었다.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병실에 누워 신음하면서 당신이 들려줬던 그 이야기요. 한번도 상여가 나가지 않은 집이 있다면 향불을 구해오라는 부처님의 말씀. 결국 태어난 모든 것은 죽고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가장 평범한 진리라는 것을 깨우칩니다. 당신을 이제는 영원한 사랑으로 편안하게 그리고 기쁘게 보내드릴게요.”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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