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황 국가인권위원장
1986년 6월 서울대 재학중인 22살의 여대생이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 하던 중 경찰에 체포됐다. 담당형사는 ‘5.3 인천사태’ 관련 수배자 소재 파악을 위해 그녀에게 성고문을 가했다. 감옥에 살던 여대생은 변호사를 통해 자신이 당한 성고문 사건을 언론과 여성단체에 알렸고, 전 국민은 분노했다. 경찰은 그러나 형사를 처벌하기는커녕 피해자인 그녀를 공문서 위조죄로 오히려 체포했다.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사건’이다. 3년여간 국민의 공분을 자아낸 이 사건은 한 변호사의 피땀 어린 노력에 힘입어, 징역 5년의 실형이 형사에게 내려지면서 일단락됐다. 조영황(64) 변호사. 30여년간 ‘인권’을 변호해온 그가 이제는 인권위원장이라는 낯익은 이름으로 우리 곁에 다시 왔다.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지난 4일, 서울 무교동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실에서 조 위원장을 만났다.
# 특검 1호 불자변호사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변호하려면 끊임없이 나를 낮추는 법부터 깨우쳐야 합니다. 법당에서 부처님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다보면, 내가 사라지고 남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을 파헤치는 특별검사 활동 이후 1990년대 초 조 위원장이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1000일 기도를 시작한 이유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사람 저사람 이사건 저사건을 접하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기 본래 마음의 성질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지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기도정진에 열중했더니 심신의 번뇌가 조용히 가라앉더군요.” 당시 조 위원장의 1000일기도는 교계 안팎에서도 화제가 됐다. 변호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으레 언론 방송에 오르내리면서 ‘스타’가 되기 마련인데 조 위원장은 ‘부처님’을 찾았다. 자기수행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성전’을 달달 외울 만큼 경전공부에 충실했고 1000일기도 덕택에 평상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불경 속에는 바른 길잡이가 숨어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사건이나 사물을 한쪽으로 단정짓기 쉬운데, 그렇지 않는 불교의 본성에 매료되었지요. 부처님의 설법은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와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위해 법조인으로서 조정과 중재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법령집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대로만 한다면 모범 인권국가가 됩니다.”
조 위원장은 지난 1999년 조계종 중앙신도회 선거관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중앙신도회장을 최초로 경선을 통해 선출하는 기회인만큼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선거하기 위해 신중을 기했었다”고 회고한 조 위원장은 이종구 전 국방부 장관, 박윤흔 전 환경처 장관 등과 함께 조계종 중앙신도회 고문을 맡고 있다.
# 中卒 독학으로 사시 합격…’미스터 청렴’ 별명
조 위원장은 중졸(中卒)이 최종학력이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했지만 28세가 되던 1969년, 독학으로 사법고시(10회)에 합격했다. 변호사가 된 뒤에도 그는 고향(전남 고흥)서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장학금을 전달했다. 그의 장학사업에 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향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우려 하자 “만약 세우면 내 발로 차버리겠다”며 강하게 반대했던 그다. 자신의 집에 ‘선물 사절’이라는 글귀를 붙여놓아 ‘미스터 청렴’으로 불렸던 조 위원장은 심지어 ‘점심 한번 같이 하자’는 주변사람들의 제의를 끝내 들어주지 않아 지인들간에 ‘원성’도 자자하다.
사회적 약자 변호하려면 끊임없이 하심을 배우고
내삶이 부끄럽지 않도록 헌신적 봉사로 회향할 터
“원칙대로 사는 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공직자는 민원인들로부터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받아서는 안됩니다. 작은 것이 공직사회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됩니다. 명절 등에 들어오는 선물이 있으면 항상 직원들과 협의해서 양해를 구하고 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했더니 사람들이 인식을 달리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정이나 판결에 대한 믿음도 얻게 되었지요.”
조 위원장의 청렴한 삶은 이뿐만 아니다. 동료 변호사와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이용하는 검소함을 실천했고, 회식비용을 아껴 매달 정박아 시설에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법조인으로서의 생활을 떠날 때도 6년여간 부은 적금으로 함께 일해 온 직원의 퇴직금을 마련해줬다. ‘부천서 성고문 특검’에 대한 주변의 찬사에도 그는 지금까지 “선량한 사람들이 권해서 떠맡았을 뿐 나는 별로 한 일이 없다”며 겸손한 모습으로 일관해왔다.
# 고향 내려가 시골판사 생활
30년간의 변호사 생활을 접고 지난 2000년 3월, 조 위원장은 고향인 전남 고흥과 보성의 군(郡)법원 판사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내가 스스로 정한 변호사의 정년이 됐다”며 서울을 떠났다. 사람들이 고향에 사는 그를 찾아가 ‘법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농촌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시골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에게서 찾기 어려운 순수와 상식을 갖고 산다”고 답했다. 당시 그는 법원 일이 끝나면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나 농사이야기를 듣는가하면 직접 밭일을 하기도 했다. 농촌생활을 몸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다.
“분쟁이 발생하는 현실을 알고 그 현실에 걸맞게 법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나 싶어 그렇게 살았습니다. 시골에서는 법을 내세우면 안 됩니다. 판결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인데 패자는 마을에서 부끄러워 더 이상 살수 없기에 두 사람이 화해할 때까지 판결을 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시골판사로 산 그는 농번기에는 아예 농민들의 바쁜 농사 일정을 고려해 재판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헌에도 농번기에는 재판하지 않았다는 ‘판례’가 전해진다고요.(웃음)”
조 위원장은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가 되었을 때 일터에서 퇴장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법조인에서 영원히 은퇴를 했었다”고 말했다. 인권위원회 일을 맡게 된 것에 대해서도 “내가 빚지고 살아온 사회에 마지막으로 봉사할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돈벌어 잘 먹고 사는 것만으로 인생을 잘 산 것으로 보기는 어려워요. 내 삶을 내가 정해서 내게 부끄럽지 않도록 회향하기 위해 언제나 변함없는 원력을 세우고 또 세웁니다.” 오는 2008년까지 펼쳐질 ‘조영황호 인권살림’이 주목된다.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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