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정 순(김해 해성사 신도)
제가 부처님 전에 귀의한지도 어언 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습니다만, 불법에 귀의한 이래 이 8년 동안 제게 일어났던 변화들은 너무나 엄청난 교훈을 심어주었고 바르게 사는 삶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탐·진·치 삼독으로 가득 차 있던 이 몸과 마음은 제멋대로 길들여진 야생마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35년간 고삐 없이 방황하던 야생마는 이제 안전한 정착지에 말뚝을 박고 훌륭한 조련사의 지도를 받으며 서서히 순하디 순한 동물로 하루하루 변모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너무나 어리석고 헛되게 살아온 아까운 나날이었습니다. 이제 늦게나마 그토록 만나기 어렵다는 불법을 만나 부처님의 높으신 가르침으로 마음에 가득 끼인 때를 조금씩 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릅니다. 진작에 느껴보지 못했던 큰 행복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가 처음 천태종을 찾았을 때는 원인도 잘 알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서울과 부산 등지의 큰 병원만을 전전하다가 마침내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을 받고 차라리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하려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 구인사에 가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주위 신도님들의 강한 권유로 소백산 구인사를 찾은 것이 부처님과의 인연줄이 되어 마침내 병마를 이겨내겠다는 소원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에게는 사람답게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체득하게 된 것이야말로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내 생애 가장 소중하고도 고귀한 수확이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모진 병마에 시달리게 된 자초지정은 이렇습니다.
1982년 8월 중순의 어느날인가 집에서 빨래를 하다가 일어서는데 그만 허리가 삐끗하며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후로 허리의 통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걸음만 옮기면 양 다리가 터지는 듯 당기고 저려 도저히 보행이 불가능했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척추 디스크인 줄 알고 지압도 받고 침도 맞고 좋다는 약도 먹고 별의별 짓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없이 고통은 하루하루 더해만 갔습니다. 이젠 걷는 것은 고사하고 단 5분도 서서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은 심해만 갔습니다. 천언만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병원의 진찰 결과 척추뼈 중 넷째와 다섯째 요추에 금이 가고 상했으니 절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더더욱 충격을 준 의사의 말씀은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한 가정의 살림을 이끌어갈 가정주부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앞으로 평생을 누워 지내란 말인가’ 생각하니 허공이 빙글빙글 돌고 심장 뛰는 소리가 마치 세찬 빗줄기 떨어지듯 ‘후둑후둑’ 들렸습니다. 그렇잖아도 본디 심장이 약하고 노이로제 증세가 있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리며 밤잠을 제대로 못이루는 때가 다반사였던 저였기에 그 충격은 더욱더 크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젠 노이로제 증세가 극치에 달하여 몸과 마음이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지고 삶의 의욕조차 상실하게 되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고통스런 나날만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악성위장병까지 곁들여 ‘××제’니 ‘○○환’이니 하는 약이 머리맡을 떠날 날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오른쪽 팔의 관절마저 까닭 없이 붓고 쑤시기 시작해 일상의 가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심한 노이로제 증세로 밤마다 잠을 제대로 못자다보니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눈에는 항상 벌겋게 핏발이 서 있으며 햇빛에 나가면 눈이 따가워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는 일종의 안질까지 겹쳐 몸이 만신창이가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한두 가지도 아닌,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견디어낼 수 없는 고통 때문에 결국 진통제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4개월여 병마에 시달리는 생활을 통해 기력이 모두 탈진한 즈음 구인사 신도님들의 권유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982년 1월 29일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구인사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대도(大道)는 문이 없다더니 내가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떠나는 날도 고통을 참지 못해 진통제를 먹었고 혹시나 싶어 가방 속에 진통제 몇 알을 챙겨넣었는데, 구인사로 가기 전날 밤 가방 속 진통제 안에서 온갖 더러운 벌레들이 날라나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보통때 같으면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파 못견디는데, 그날은 8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구인사에 도착할 때까지 허리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의 향적당 위에 있던 기도실에 여장을 푼 저는 형용할 수 없이 뭉클하고 황홀한 감정에 사로잡혀 첫 4박 5일을 거의 엎드린 자세로 제 마음을 하나로 모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그 알듯 모를듯한 자비의 미소를 접하는 순간 내 과거의 삶이 너무도 죄스럽고 부끄러워 터져나오는 오열을 속으로 삭이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정 새 삶의 시작이었으며 올바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달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뒤 집에 돌아와서도 온종일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기도밖에 몰랐습니다. 눈앞에는 5층 큰법당과 부처님의 거룩한 미소가 하루 한시도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동지 섣달 얼어붙은 찬 밤바람 속에 김해 해성사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육신은 전과 변함이 없었으나 제 소망, 저의 믿음은 싱싱하게 물오른 새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진통제와 절망이 다 무엇이던가. 한마음이면 되는 것을’ 절절한 염원과 바램으로 기도하기 약 20여 일째 되던 어느날 계속된 철야기도로 피로가 쌓였던 저는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곤한 잠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잠결에서 갑자기 제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것같더니 방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서 다시 제 자리에 와 눕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눈앞에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면서 한 송이 빨간 장미꽃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잠시 사라졌다가는 다시 꽃송이가 나타나더니 누군가 재빨리 저의 오른쪽 눈에 고약같은 시커먼 약을 발라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손등에도 똑같은 약을 잔뜩 발라주었습니다. 그리곤 몸도 얼굴도 보이지 않고 다만 하얀 두 손만이 나타나 가느다란 끈으로 제 아픈 허리를 몇 겹인가 감아서 살짝 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다리도 차례로 쓰다듬어주었습니다. 저는 엉겁결에 ‘저의 허리를 낫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다가 놀라 깨어났습니다.
아무래도 기이한 꿈이었지만 분명히 현몽이었습니다. ‘아, 관세음보살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과 함께 목이 콱 메이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양 볼을 타고 마구 흘러내렸습니다.
그날 저녁 해성사에 나가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고 예배한 저는 목메인 소리로 밤을 밝히면서 기도 반, 울음 반으로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가피력에 환희하며 감사드렸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신앙적 체험을 겪고 나서야 저는 인간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부처님 전에 귀의한지 8년이 지난 지금 저는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으로 해성사 신도회 간부의 일원으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열심히 기도정진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김해의 대한불교천태종 해성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리라고 부처님 전에 몇번이나 맹세를 했습니다.
자연이 춘·하·추·동으로 한 계절씩 옮아가며 허물을 벗듯이 저 또한 크나큰 깨달음을 이루고 성불하는 그날까지 부처님 도량에서 마음의 더러운 때를 한 꺼풀 한 꺼풀 꾸준히 벗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전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세세생생 보살도의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서원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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