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년 전쯤의 일이다. 어느 초겨울 건강도 시원찮았고, 이 나이에도 때론 흩어지려고만 하는 자신을 가다듬고 싶어 대구에 사는 독실한 불자인 질서(姪壻)의 주선으로 잠시 실상사에 묵은 일이 있었다.
실상사는 신라 9세기때 증각 대사(홍천 국사)께서 세우신 사찰이며 구산선문의 제 1문이라고도 하여 이름 있는 사찰의 하나이다. 그때와는 달리 부속건물 몇 채가 더 들어섰지만 아담한 보광전(寶光殿)과 천왕봉(天王奉)을 멀리 바라보고 계시는 약사여래 부처님의 모습은 태고를 간직한 듯 오랜 연륜의 정취가 흐르며 빛나고 있었다. 특히 보광전 앞에 자리한 탑과 아름다운 석등의 조화는 정말 절묘했다.
극락전 앞에 조그만 연못과 그 못가에 조그만 대숲이 있어 일과다 싶이 그곳을 찾았고 극락전 옆에 자리한 홍천 국사와 이조(二祖) 수철 화상의 부도탑의 아름다운 운치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때가 많았다. 80이 다 되는 이 나이에도 아침 잠이 많은 나지만, 새벽에 울리는 장중한 범종소리에 일찍 일어나 조석예불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아침예불에서 돌아와 잠시 명상시간을 가져도 보고 `사람에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으로 머물러 있는 일`이라고 하는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수상집≫ 한 구절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집에서 많든 적든 모든 가사를 손수 하는 습관이라 하루를 때우는 일이 때론 버거운 때도 있었지만, 시간을 내어 갖가지 좋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도량 안에 있는 전통찻집에 하루 한번씩을 꼭 들리고는 했다. 사찰 외곽에 약수암길(화림원) 가는 언덕길, 그외 산책할 만한 시골길도 있어 나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시골길을 걷는 일은 홀로 즐기고 좋아하는 일의 한 가지였다.
공양간 일이 바쁠 때는 좀 돕기도 하고 콩도 고르고, 채소도 다듬으며 일손을 도왔다. 공양시간에는 스님네와 30여명 되는 귀농학생과 그외 대중이 다 모이면 그 넓어 보이는 식당이 가득차곤 했었다. 어느날 저녁 공양하는 내 옆에 낯설은 보살님이 한 분 앉아 계시는데, 한 40세쯤 되어 보이고, 생머리를 뒤로 묶은 수수한 옷차림에 분위기가 조용하고 눈이 맑은 사람이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보니 그는 독신이며 카톨릭 신자이고 가평 쪽이 직장인데 건강이 안 좋아 병가를 얻어 왔다고 한다. 올드 미스라고 생각을 하였더니, 그보다 나이가 많다고 한다. 어느 나이가 올드 미스의 기준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새삼 또 놀란 것은 그 이튿날 새벽부터 조석예불에 꼭 정성을 다해 예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그가 묵는 방은 미닫이 하나 열면 되는 내 바로 옆방이었다. 우리는 임시 묵어갈 같은 처지여서 그런지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언덕길에 오르면 밭 언저리에 있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연시를 두어 개씩 주워 먹기도 하며 떨어진 홍시가 아까워 잔뜩 주워다 절에 계시는 노보살님께 갖다 드리기도 하였다. 그 보살님이 나와 다른 것은 공양이 끝나면 얼른 앞치마를 걸치고 설거지를 하고 찻집에 가면 이것저것 바쁜 일을 거드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노크하고 문을 열면 책을 보고 있거나 속옷 등을 꿰매기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요즘 젊은이가 아니구나!` 감탄한 적도 있었다.
일요일이면 버스를 타고 인월이라는 읍 같은 데로 성당미사에 꼭 갔다 오고는 했으며 내가 인월병원에 약 가지러 가면 노인네가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농을 하면서 기어이 동행해 준다. 가끔 발톱을 깎기 힘들어하는 나를 보면 얼른 와서 능숙한 솜씨로 발톱을 깍아 주기도 한다.
타종교 의식에 그만큼 정성을 다하여 존중을 한다는 건 우리 생명의 근원의 뿌리가 하나라는 확신이 없고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내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웠다. 어언 그의 병가도 끝나 떠나던 날, "보살님, 나 버스 있는 데까지 전송해 주셔야 되요." 하며 웃는 그를 시골길 버스에 실어 보내면서 퍽이나 서운했었다.
큰 심장수술도 하고 소화기도 안 좋아 큰소리로 말도 못하는, 그러면서도 내색도 없이 온갖 것에 최선을 다하던 그를 떠올리는데, 두어 달 후 서울 큰 딸아이네 집으로 연락이 왔다. 지금은 서울 명당성당의 카톨릭 문화회관이 근무처라면서 전화로 반가이 만나기로하고, 만날 장소에 나가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앉아 있는데 저만치 선녀같이 날씬한 수녀님 한 분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순간 마주 미소지으며 "아! 그랬구나." 하고 이 일 저 일 이 다 수긍이 갔다.
그는 다가와 앉으면서 오늘 할머니한테 단단히 야단맞을 각오를 했다면서 그는 절에 묵을 동안 조금이라도 폐가 될까 봐 그랬단다. 할머니 만날 즐거움으로 옷도 곱게 곱게 다려입고 나왔단다. 우리는 10년지기를 만난 듯이 반가웠다. 그는 30년 가까이되는 고참 수녀님이었다. 할머니가 책읽기를 좋아한다고 책 두 권과 예쁜 카드 한 장을 건네면서 "이건 연애편지예요." 하면서 웃었다.
집에 돌아와 펴보니 나를 배려하는 따스한 말들과 마지막 맺음에 `나의 불충분한 기도에 꼭 할머니를 기억하겠다`면서 `소중한 인연에 감사합니다` 하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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