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양수
“나는 많은 가을을 길에서 보냈다. 아직 죽지 않았다.”
안성으로 가는 길은 다소 멀었다. 토요일 오전의 고속도로는 적당히 밀리고 적당히 한가하다. 여러 도로의 교차점을 지난 안성시 죽산면 두교리 동막이라는 장소에 도착했다. 날이 무척 좋았다. 나에게 이곳은 부재한 곳이었지만 지금 내 기억으로 이 장소가 막 들어온 것이다. 문득 일본 하이쿠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수행으로 정화한 ‘마음’ 투영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터에 작은 작업실과 살림집이 오롯하게 자리한 곳은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인다. 갑자기 저 저수지 옆에서 낚시나 하면서 생을 보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 물가는 더없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워서 모든 물들이 비로소 제 생을 더욱 차갑고 정갈하게 흘려보내는 계절 같다. 수수하면서도 간결하게 꾸민 자취가 베어있는 곳에서 겨울날 햇살과 바람을 수시로 접하면서 시골집을 손봐 한쪽에는 작업실을 마련하고 본체는 적당히 손을 봐 기거하고 있는 작가를 만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안온한 작업실 내부는 나무로 마감이 되었고 작은 창을 내어 그곳에서 햇살이 가득 들어온다.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다 문득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한 작가의 사진이다. 갑자기 티베트까지의 긴 여정이 환영처럼 떠오를 것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혹 티베트를 늘상 꿈꾸며 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일로 많은 작가들의 작업실을 찾아다녔지만 여전히 미처 못보고 가보지 못한 곳, 알지 못하는 작가들이 내겐 너무 많다. 김양수라는 작가도 그곳에서 그렇게 처음 만났다.
내 기억 속에 부재한 작가의 작업을 비로소 처음 만났다. 그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현재 이곳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요양을 겸하는 작업생활은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소중한 체험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이는 고스란히 작업에도 반영돼 자연과 벗하고 사는 삶의 풍경이나 자연이나 생명체들이 간소하게 화면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설명>작품 `아침 이슬을 머금고` | 작품`고양이 꽃을 마주하다` | 작품 `소낙비 소리에`
작가의 이전작업에도 분명 그러한 요소는 강한데 근작에 오면 그 체험이 보다 더 절실하게 개입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직접 채소를 가꾸고 자연의 변화와 이치를 몸소 체감하는데서 자연스레 나오는 그림들이다.
작가는 수묵을 통해 짧은 하이쿠나 시, 한 두 문장으로 압축된 시 같은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에게 그림은 산문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시다. 시 같은 그림이란 이미 오래 전부터 화가들이 꿈꿔왔던 경지다. 사실 그림 역시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고 이미지를 빌어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려는 매체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림은 장면을 부득이 보여준다.
그림 역시 문학과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다만 문학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말한다. 서양화란 화면 가득 채운 형상과 색채를 통해 보는 이의 눈을 압도하고 볼거리를 감동적으로 안겨주기 위해 고안한 여러 장치에 의해 지탱되는 미술이다. 그것은 어떤 장면을 순간적으로 고정시키고 얼려놓은 그림들이다. 드라마가 있고 이야기가 전개되며 서사적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시키는 한편 특정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따라서 원근법은 필수적이다. 원근은 납작한 화면에 실제의 공간, 풍경을 떠올려 주면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빛, 광선 역시 절대적이다. 빛과 그림자가 현실감을 강화시키면서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막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전달해주기 위해서 동원된다. 그런 그림을 문학적 혹은 연극적인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동양화는 수묵의 경우,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검은 색, 모든 만물과 사물을 결국 하나로 보는 시선에 의해 지탱되는 먹을 가지고 현상의 본질을 매개할 뿐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전달한다기 보다는 상황을 요약한다. 군더더기 같은 말을 지우고 수식을 배제하고 뼈다귀 같은 것 하나만을 툭 던져놓고 나머지는 보는 이가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그림은 서구의 경우처럼 보는 이의 망막에서 완성되지 않고 보는 이의 정신적 활력에 의해 부단히 환생한다. 어쩌면 동양화야말로 무척 시적인 그림이라고 생각된다. 하긴 동양화, 수묵화란 결국 지식인들의 그림이었고 그 지식인, 문사들이 시, 서, 화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들이기에 문학, 철학과 분리될 수 없는 성향들이 있다. 그것은 정신적인, 지적인 깨달음을 간단하게 도상화 한 그림들이다. 산과 나무, 물과 사람이란 한정된 소재를 가지고 이를 가지고 이런 저런 시적 상황을 만들어나간다. 김양수 역시 뒷모습을 보이고 좌정한 사람(스님인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인지 혹은 그 모두일 수 있겠다), 작은 집(사찰), 나비와 꽃, 새와 개구리, 해와 달이란 소재를 가지고 시적 문장을 만든다. 그것은 시화 같기도 하고 선화 같기도 하다. 독실한 불자로서 자신의 수행과 마음 상태를 그런 소재를 빌어 표현하고 싶어한다. 사실 이런 그림은 짧은 문장이 슬쩍 곁들여야 제 맛이다. 그의 도록에 실린 글을 몇 개 뽑아보았다.
“늘 혼자 앉아 노는 바위 위로 이따금 솔바람이 건너와서 비질을 해주고 쌓인 먼지를 불어가 준다. 마음에 먼지 앉을 날 없다”, “헝크러진 머리에 적삼이 무슨 소용인가 어리석은 자여! 너의 내면이 어지러운데, 너는 거죽만 다듬고 있구나”(법구경)
이런 문장 옆에 단촐한 이미지가 텅 빈 화면에 독대하고 있는 그림이다. 다소의 갈필로 핵심적인 대상만을 간단히 묘사한 후 담채로 색을 얹힌 후 나머지는 과감하게 비워두는 방식이다. 무척 심심하지만 외롭게 놓인 대상을 통해 말로 전하지 못하는 세계가 이해되거나 감지되었으면 하는 그림이다. 자칫 소박한 정신주의나 상투화될 수 있는 소재주의의 아쉬움도 있어 보이지만 일관되게 그림을 통해 자신의 표현하고자 하는,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를 드러내는 그런 그림이다. 다만 이런 식의 그림이 다른 유사 작품들과 어떤 식으로 차별성을 보여줄 수 있을 까가 고민되는 부분이다.
단촐한 이미지 텅 빈 화면
인상적으로는 마치 이철수의 선미가 가득 풍기는 판화와 유사한 그림을 대하는 느낌이다. 사실 이런 그림은 화가 자신의 수양과 수행, 마음과 정신의 경지에 비례해서 나오는 경지다. 그와 동시에 아무리 높고 고상한 사유의 세계라도 그것이 완성도 높은 그림으로 적절하게 형상화되지 못한다면 치기에 머물 수도 있다. 그림은 모든 걸 상상할 수 도 있고 모든 것을 표현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림은 그림을 뿐이다. 그림이 정신이나 사유, 철학과 동일하게 나앉을 수 는 없다. 그림을 그리면서 수행을 쌓는 이는 그림 그리는 일로서의 수행이 우선되면서 자연스레 정신이 그 안에 투영되어야 할 것이다. 작업으로서 부단한 수양과 수행이 쌓일 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경지, 정신의 편린 역시 적절하게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수행이 깊고 그림의 공덕이 더욱 쌓이면 그가 살고 있는 이곳 저수지 물들도 더욱 깊고 고요히 흘러갈 것이다.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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