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건 그의 글을 읽고나서였다.
"당신은 밤하늘의 별과 같은 인생을 사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상처받은 영혼이 먼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위로 받고,
여정을 멈춘 나그네 또한 쏟아지는 별 빛 아래에서
잠시 짐을 내려 휴식을 취합니다.
당신은 별을 꿈꾸시는 건가요?
사람들에게 위로와 휴식을 안겨주는 별이 되고 싶으신가요? "
라고 시작되는 편지글에,
"나는 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단 한 차례도 남들 머리 위에 떠 있는 자신을
그려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목마른 길손에게 물을 떠 준 일도 없으며
길 잃은 자에게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킨 바도 없었습니다.
메마른 강가의 시든 풀처럼 물기를 잃은 채 말라가고 있던 내게
누가 휴식과 위안을 구한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우러르는 별을 꿈꾸기에는 나는 보잘것없는,
길바닥에 구르는 작은 돌에 불과하였고 지금도 또한 그러합니다."
라고 쓴 장문의 답신!
단편 소설 한 편 분량의 두 편지글에서 그가 뱉어낸 언어들은 은빛으로 날카롭게
빛나며 내 가슴에 파고들었었다. 어느 부분을 읽어 내릴 때는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돋기도 했으며, 또 어느 부분에서는 애잔한 마음이
되어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었다.
사랑했으나 함께 할 수 없었던 연인들!
그 절절한 사랑이 그의 언어를 통해서 살아나고 있었고, 그 날카로운 언어에 가슴
을 베인 나는, 한동안 가슴속에서 스산한 바람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글에 나타난 그의 사랑이, 그의 외로움이, 그의 암울했던 어린 시절이, 그의 예리함
이, 또한 그의 남모르는 연약함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했다.
그것이 그와의 시작이었다.
내가 친구로부터 그를 소개받은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나보다 7살이나 아래인 그는, 童顔에 작은 키를 하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
고 있던 180센티미터의 내 아들보다도 훨씬 작은 그는, S대 출신의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내게 만만함을 갖게 했다. 아마도, 童顔인 데다가
그의 작은 키가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했던 것 같다.
"청소년 시절, 참 힘들었었지요. 그래서 키가 안 자랐나 봐요."
그는, 자기의 키 작음에 대해 그렇게 말했었다.
어느 늦은 오후, 그와 나는 조붓한 산자락의 아담한 카페에 앉아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는 산등성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산허리에는 주황빛 노을이 걸리고 있었다.
"난 하루 중 이 시간이 젤 싫어요."
그가 불쑥 말했다.
"왜?"
의아한 눈빛으로 내가 물었다.
"노을이 지면서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는 이 시간이 싫어요. 웬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지거든요. 밝음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닌, 아주 모호한 회색 빛 느낌이요. 스
산하고 삭막하고...... 어떨 땐 땅 속으로 꺼져드는 느낌이에요. 그럴 땐 `죽음`이나
`떠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죽음`이나 `떠남`에 대해서 예민했다.
어린 나이에 시작된 `아버지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
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하루종일 기다리며 사랑에 목말라 하던 소년!
어둠이 내리고 노을이 지고, 그러고도 깜깜해져서야 돌아오는 어머니를 어둠에 쌓
여 가는 텅 빈 집에서 무서움을 견뎌내며 기다려야만 했던 겁 많은 소년!
그 지루한 시간에 찾아오는 붉은 노을 빛은 그의 기다림을 극대화시키며 견디기 힘
들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어린 소년이 견뎌내기에 그 시간은 차라리 형벌이었으리
라!
나는 어둠이 스멀스멀 내려앉으며 붉은 빛으로, 또는 주황빛으로, 때로는 잿빛으로
변해 가는 노을을 바라보는 그 시간을 가장 싫어한다는 그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으
며, 그 말을 듣는 나는 가슴이 아팠었다.....
그는 글 쓰기를 즐겼으며,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全業으로 글을 쓸 수 없음을 아주
애통해 했다. 그는 광고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카피라이터는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직책은 자금 담당 이사였다.
자금 담당 이사인 그가 쓰는 글은 대부분 날카로웠으며 예리하게 핵심만을 얘기하
고자 했다. 대학 시절 몸담았던 운동권 출신답게 그의 글은 아주 논리적이었으며
또한 질서정연했다. 그러나, 어두웠다.
어떤 문장들은 아주 화려해서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으나, 그 문장의 화려함에도 불
구하고 그의 글은 너무 어두워 읽는 사람의 마음에 알게 모르게 아픔을 남겼다. 그
의 글을 읽으면서도 나는 가슴이 아팠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내게 "회사를 때려 치웠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왜?"
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말하지 않고 `때려 치웠다` 라고 말
할 때, 그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묻지 못하게 만들었다. 짐작하
고 있던 일을 벌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일을 저질렀네......" 라는 내 말에, "떠나기 전에 알리고 가려구요......" 라고
그가 말했다.
강원도 인제를 지나 한계령 자락 필례 계곡 어느 골짜기 무슨 `山房`으로 당분간 거
처를 옮길 거라고 말하는 그에게 `식구들은 어떻게 할건지, 들어가서는 얼마나 머물
건지, 언제 내려올 건지` 같은 말들을 나는 하나도 묻지 못했다. 다만, 나는 먹먹한
마음이 되어 "잘 다녀오고, 다녀와서 꼭 보자......"는 말만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내 머리 속에서 `결국 저지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가 가
지고 있는 글 쓰기에 대한 열정이 회사에 더는 붙어 있지 못하게 만들 것이라는 걸
조금씩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떠난 그를 나는 가끔 생각한다. 필례 계곡 어딘가에 있을 그를 생각하며 지
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한다. 내게 자주 말했던 것처럼, 수염을 덥수룩
하게 기르고 길게 자란 머리를 뒤통수에 꽁지로 매달고 있을까?
`자유인`이 되고 싶다던 그가 깊은 골짜기에서 산허리에 걸리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난 이 시간이 너무 싫어." 하고 말할까? 아니면,
이제는 감정의 굴곡을 여과시켜 검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낼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의 외로움, 슬픔, 모두 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칼날이 서지 않은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어 여러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글을 써내기를 원한다.
산허리에 걸린 붉은 노을을 바라보다 문득, 어쩌면 그는 스스로 글에 쓴 그런 `별`
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영혼이 바라보며 위로 받는 별!
여정을 멈춘 나그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바라보는 별!
그렇게 사람들에게 위로와 휴식을 안겨주는 별!
정말 그가 그런 생각을 했었던 건 아니었는지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를 다시
만나면 반드시 물어 보리라! 스스로 `별`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느냐고.......
그가 그립다.
그러나 나는 선뜻 그를 찾아 나서지 못한다. 다만, 내게로 올 때 `별`과 같이 반짝이
는 글, 수도 없이 반짝이며 사람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안겨주는 `별` 같은 글을 그
가 내게 한 아름 안겨 주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 기도할 뿐이다.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함께...... 슬픔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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