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한국불교
번호 : 39915     조회수 : 11699     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07-03-09 오후 2:10:59    
3. 불교의 역사

4)한국불교

<출처:조계종 포교원>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공식 기록은 불기 915(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중국 전진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도 출신으로 가야국의 수로왕비가된 허씨 부인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가져 왔다고 일부 학자들이 강력하게 제가 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불기 915년 이전에 이미 우리 나라에 불교가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받아들인 시기에 불교는 격의불교 였다. 이후 인도의 중관사상을 계승한 삼론종에 대한 역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가 성행하고 불교는 정치적 세력 투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채 고구려의 패망을 맞았다.

백제는 불기 928(서기 384)년 침류왕 때에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 밖에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교학 연구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와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라에는 고구려의 묵호자에 의해 불기961(서기 417)년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불기 1071(서기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되었다. 신라불교의 고승대덕들은 <<삼국유사>>등의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이 전해지는데 원광 - 안함 - 자장 - 보덕 - 낭지 - 혜숙 - 혜공 - 대안 - 원효 - 의상 - 태혀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일대 사상가들이 배출되면서 7~8세기에 화려한 황금기를 맞이 하였다.
원광법사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에 세속오계를 주어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원효, 의상스님이 이루어낸 눈부신 교학연구의 성과와 인재 양성은 중국까지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국불교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신라인들은 특히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 라는 신념으로 가득차게 되는데 이를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이라 하며, 호국불교사상이라고도 한다.
이 신라인들의 불교를 매개로 한 정신적 통일과 힘의 결집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선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신라인들의 이런 사상이 투영된 것으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던 화랑과 불국사, 석굴암, 경주 남산 등의 불교성지를 들수 있다.
용화향도란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여는 무리` 라는 뜻으로 신라 땅에 미래불의 국토인 용화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화적 걸작은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인 발전을 포괄한 삼국의 성취였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채 발전하면서 우리의 전통사상과 무화로 깊이 뿌리내렸다. 불교는 특유의 사상적 포괄성으로 민속신앙을 섭수하여 큰 마찰없이 이리 민족의 전통사상과 무화로 자리잡았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과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 성과는 불교 뿐만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다.

고려불교는 통일신라 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종의 흐름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 개산한 일곱 산과 고려 초의 두산을 합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성립되었다.
이 선종의 구산에 교종의 다섯 가르침을 합하여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 한다.
오교구산이란 5개의 교와 9개의 선종 종파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종과 교종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다양한 모습을 띤 것은 신라가 패망하던 시기 각 지역 호족세력의 발흥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지역의 호족 실력자들은 자신의 세력을 도모하기 위해 앞다투어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모셨던 것이다.

고려시대 불교는 삼국시대에 이어 국교(國敎)의 지위를 확립하여 국가적인 지원 아래 지배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고려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도선국사의 영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과 탑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건축술도 뛰어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인정되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 때에 지어졌다. 아울러 불화(佛畵)가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데 국왕들은 대대로 당대 고승을 국사(國師)로 모시어 정신적인 지도를 받았다. 이에 따라 왕실의 후원으로 사찰이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스님들이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어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뜻 있는 스님들 사이에 권세를 멀리하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 가자는 사상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스님의 정혜결사, 요세스님의 백련경사가 그러한 예이다.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억압과 수난의 시기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주자학과 성릭학으로 통치이념을 정립하여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비하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큰 규모로 성장하였던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백정과 같은 팔천민의 하나로 신분을 낮추고 서울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뿐 아니라 불교는 셀 수도 없이 많았던 사찰을 몇십개만 남기고 강제로 폐찰당했고 각기 특성을 지니며 계승 발전하던 각 종단도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되는 등 세계종교사에서 드문 종교탄압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불교는 혹독한 억불정책 아래에서도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 명맥을 이어갔다. 비록 유교 성리학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왕족과 양반가의 부녀자들은 대대로 믿어 온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특히 태조와 세종, 세조, 정조 등은 매우 독실한 불자였으며,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세종대왕은 훈미정음을 창시하면서 한문 경전을 민중들이 쉽게 알수 있고 이해하도록 한글로 번역시키기도 하였다.
서기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서산, 사명대사가 구국을 위해 의승부대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완화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혹독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조선후기에 들어 유교질서가 한계를 드러내고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민중들의 삶이 어렵게 되자 사찰도 여려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 개혁적인 스님들은 유교지배 아래의 조선을 혁신하고자 민중과 더불어 여러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각종 민란에 스님들의 참여도 나타나게 된다. 특히 19세기 말 안으로 빈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와 밖으로 거대한 흐름으로 다가오던 서양 열강의 침략위협 아래 불교사상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이동인스님,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거사 등이 개화당을 결성하여 서기 1884년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놓여 있던 20세기 전반은 한국불교에도 암울한 시기였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는 일본불교는 정부의 후원 아래 각기 경쟁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포교 활동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에 봉사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군사적인 침략에 앞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지배의 정보 탐색과 지배 이념의 창출에 앞장섰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특히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장하여 시행한 <사찰령>은 조선불교를 식민지 총독 통제 아래 놓이게 한 법이었으며, 이것은 일본에 대한 예속을 촉진하였다.

일제는 사찰령과 여러 조치를 통해 조선불교의 훌륭한 전통을 유린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권장한 것이었다. 사실 일본불교는 오래전부터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었는데 이점은 조선불교의 청정비구와 대비되는 약점이었다.
이리하여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대부분 결혼하여 처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위배되었고 조선불교의 전통과도 어긋난 것이었다. 한편 신민지 시대에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본사 주지스님들을 중심으로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법인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백용성, 한용운, 박한영 등 적지 않은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불교 청년회, 만당 등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불교정책을 거부하던 청정 비구승들도 선학원을 결성하여 자주적인 활동 거점을 유지하면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는 필연적으로 일제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가 과제로 제기되었다. 해방의 혼돈기에 불교개혁과 교단혁신을 위한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좌우이념 대립의 와중에 휩싸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쟁 직후 일제시대 합법화되었던 스님의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교단 정화를 요청한 청정비구들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치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러 차례의 혼돈 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조계종은 청정비구 중심의 출가승려로 재편되었고 여기에 반대한 스님들은 독립하여 창종을 하였다.
이리하여 이유야 어떻든 한국불교는 여러 종단으로 나누어졌으나 오늘날 불교계 각 종단의 협력기구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구성하여 전불교도의 총의를 대변하고 있다.

한편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은 조계종은 1960~70년대 정화운동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분란이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뜻있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포교, 역경, 도제양성이라는 종단의 3대과업이 정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불교운동과 민중불교활동이 전개되어 성과가 있었다.
『종헌』과 『종법』등 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총무원과 더불어 도제양성과 포교를 전담하는 기구로 <교육원>, <포교원>을 독립시켜 종단 활성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민족이 분열되어 대립되고 있으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서양화로 정신적인 혼돈,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의 횡행, 민족문화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고 있다.
특히 산업문명의 부산물인 환경오염은 심각하여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갈망이 높아 가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 한국불교는 민족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환경을 살리는 새롭고 건강한 문명창조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또한 물질과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지치거나 상처 입은 많은 대중을 동체대비(同體大悲)사상으로 포용하고 모두가 더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수 있는 불국토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고 믿으며 실행해 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불국토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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