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윤회사상
이 인 웅 (한국외국어대)
I. 서 론
헤세가 생존하던 시절에 이미 사람들은 '동양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이 작가를 자주 "불교도"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훗날 헤세 자신도 『요약된 이력서 Kurzgefasster Lebenslauf』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어느 정도의 진실이, 진리의 낱알이"(IV, 482) 깃들어 있다. 경건주의적 선교사 집안 출신의 젊은 작가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동양의 정신문화와 아주 밀접해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믿음과 신앙에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유년시절부터 그는 진정하고도 생생한 기독교와 더불어 동양적 불교정신을 호흡하며 살았다. 1931년에 쓴 『나의 신앙 Mein Glaube』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헤세는 종교라는 것을 두 가지 형태, 즉 기독교와 불교로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불타의 계시를 따르는 "인도적 형상 속에서 내 자신의 종교성에 대한 첫 번째 자극을"(VII, 370) 받았다고 한다. 그 다음 중국의 지혜에 몰두하고 난 후에는 중국적 도교와 유교와 불교정신의 물결이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헤세의 종교란 어느 하나의 종파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어떠한 종교와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종교와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는 무엇보다도 불교적 요소들을 많은 작품에 받아들여 문학화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의 윤회 사상을 여러 가지의 시와 소설, 그리고 그의 대표적 장편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에 구체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II. 윤회(輪廻)
인간이 죽은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 사상을 수용함에 있어서 헤세나 기타 서구의 사상가들은 동양의 불교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헤세의 작품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불교 이론에 따르면 우주만물 속에 현존하며 그 단일성을 서술하고 있는 모든 생물체의 영혼이란 육신과는 반대로 결코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경우 한 단계씩 보다 더 지고한 존재의 형태로 변화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그 스스로 완성되어 윤회로부터 구원된다고 한다. 인간의 무리나 동물의 무리, 사물이나 식물의 무리들은 서로 다른 인연 속에서 다른 발전과 변화의 과정에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에 관해 고대 중국의 현인 리애 지(Liae Dsi)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명의 씨앗이란 변형체들이다. 그 씨앗은 그가 처한 조건에 따라 식물로 또는 동물로 변화한다. 인간 역시 이러한 변형체들의 한 과정에 나타난 현상이며 다시금 이 윤회 속으로 되돌아간다. 우주만물이란 이러한 윤회 속에서 나오고 다시 이 윤회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윤회란 그러나 무한토록 긴 세월 동안 언제나 동일한 존재로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탄생되고 있는 피조물과 개체들의 과정 속에서 구원 또는 해탈을 향하여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의 환생이란 불교 이론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법칙, 즉 현생과 전생에서 수행한 각자의 행위 결과에 따라 정해진다고 한다. 행위, 즉 업보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이는 각자가 행하고 있는 외적 행위는 물론 한 생애에서 쌓인 업보에 따라 다음 생에서의 특별한 형상과 개인적 운명이 결정되는 총체적 행위소재를 뜻한다. 카르마에 대한, 재생에 대한 불교의 교훈이란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인과응보(因果應報)"란 격언과도 같이 철두철미 인과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타의 설법에 관해 많은 독서를 하고 동양의 다른 종교서들에도 아주 친숙해 있었던 헤르만 헤세는 이 카르마적 환생 사상을 이미 1910년의 예술가 소설 『게르트루트 Gertrud』에 서술하고 있다. 불행에 빠진 음악가이며 작곡가인 주인공 쿠운은 자신의 삶을 너무나도 깊이 괴로워하며 신을 찾는다. 그러나 "신은 죽었기" (II, 40) 때문에 다시 한번 절망에 빠진다. 그 이후에 그는 작가 아버지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교사 로에로부터 모든 삶의 카르마, 업보와 환생에 대한 불교적 교리에 입문하게 되며, 이 카르마적 환생론을 "인과법칙의 종교적 숭배"(II, 65)라고 규정한다. 그후 그는 결국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헌신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발견한다. 이뿐만 아니라 1915년의 『크눌프 Knulp』의 주인공인 방랑아의 인생사에서도 모든 피조물의 환생과 결부된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동양적 사상이 상징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안개가 내리면 / 꽃들은 모두 / 죽어야만 한다. / 그리고 인간들도 모두 / 죽어야만 한다. / 인간들은 무덤에 묻힌다. / 인간들은 꽃들이며 / 그들의 봄이 오면 / 그들은 모두 다시 태어난다." (III, 80)
"갖가지의 죽음 Alle Tode"이란 시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수많은 차원에서의 동양적 환생에 대한 카르마적 사상이 보다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갖가지의 죽음을 나는 이미 죽어 보았다.
갖가지의 죽음을 나는 다시 죽으려 한다.
나무 속에서 수목(樹木)의 죽음을 죽고,
산 속에서 돌 같은 죽음을 죽으련다.
모래 속에서는 흙의 죽음을,
바스락거리는 여름풀 속에서는 풀잎의 죽음을,
그리고 가련하고 피에 젖은 인간의 죽음을.
꽃으로 나는 다시 태어나련다.
나무와 풀이되어 다시 태어나련다.
물고기와 사슴, 새와 나비가 되어,
그러면 이 모든 형상(形象)으로부터
그리움은 나를
마지막 고뇌의 단계로,
인간의 고뇌로 이끌어가리라.
그리움의 광폭한 주먹이
삶의 양극(兩極)을
서로 맞서게 굽히려 할 때,
오 떨리면서 팽팽히 당겨진 활이여!
고난에 찬 형성(形成)의 길,
영광에 깃 든 형성의 길,
그대는 가끔 나를 또다시
죽음에서 탄생으로 휘몰아 가리라. "
여러 가지 생각들이 동양적 사상과 일치하고 있는 작가는 이와 같이 모든 존재를 영원한 변화의 지속적인 윤회로 간주한다. 모든 존재란 실제적으로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의 사물이나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끊임없이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명의 죽음이란 진정하고도 절대적인 존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하나의 다른 존재로의 새로운 시작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시켜야만 하기" (III, 185) 때문이다. 죽음이란 그저 하나의 세계에서 하나의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며 초월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세는 그의 논문『카라마조프 형제들 혹은 유럽의 몰락 Die Brueder Karamasoff oder Der Untergang Europas』에서 "몰락"이란 용어를 문자 그대로의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불교적인 개념으로, 즉 어머니에로의 귀환, 아시아와 원천들로의 회귀로 파악한다. 이는 자명스럽게 "지상에서의 모든 죽음이 하나의 새로운 탄생으로 통하는" 몰락인 것이다.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 Klingsors letzter Sommer』에 나오는 "몰락의 음악"에서도 헤세는 미소를 머금은 침착성으로 동양의 신앙을 설교하는 아르메니아 점성술사의 입을 통해 몰락이란 하나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데, 진정한 상승도 몰락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모두 착각이라고 진술한다. "마술사여, 당신은 내가 당신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시요? 당신은 동방에서 온 사자(使者)이며, 내게도 보내진 사자이지요. [...] 당신은 여기에서 종말이 시작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몰락에 대한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요.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몰락할 것이요, 알겠소? 우리는 기꺼이 죽을 것이며, 우리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요." -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태어날 것이라고요." 그리고 동양인은 미소지었다. "당신에게는 몰락으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탄생으로 보일지도 모르지요. 두 가지가 모두 착각이지요. 지구를 하늘 아래 견고히 서 있는 원반으로 믿는 사람, 그 자는 상승과 하강을 보고 또 그걸 믿지요. 그러나 별들 자체는 여하한 상승도 하강도 알지 못한답니다." (III, 592)
헤세의 작품들(예를 들면 『데미안』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 『황야의 이리』『동방 순례』『유리알 유희』 등)에 자주 서술되고 있는 별들이란 우주적 생명의 불멸성과 동시에 영원히 변화하며 떠도는 영혼에 대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별들에게서 "우리 내면에 반영된 영원자의 상을"(I, 187) 찾고 있다. 생명력이란 영원하다. 우주만물의 영혼이란 영원하다. 이는 결코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히 생성하며 영원히 몰락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한 머무름도 없고 여하한 종말도 없다. 영혼이란 수많은 변화의 지속적 윤회를 거듭하며 우주계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불멸적으로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영원히 새로운 환생이 형성되는 것이다.
『데미안 Demian』의 젊은 주인공 싱클레어는 별들에 관한 꿈속에서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존재, 즉 전생(前生)을 기억해 낸다. "별들이 내 앞에서 반짝 빛나더니 사라져 갔다. 잊혀진 최초의 유년시절까지의 회상이, 아니 이전의 존재와 생성의 첫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회상이 되살아나고 내 곁을 물밀듯 지나갔다."(III, 212) 클링소어도 이와 마찬가지로 죽어야 할 자신의 얼굴 뒤에서 지나간 세월의 여러 가지 상이한 얼굴들을 보게 되고 이전에 존재했던 자기 생명의 옛 현현(顯現)을 기억해낸다. "달콤하고도 놀라움에 젖어 있는 어린이의 얼굴, 꿈과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이의 관자놀이, 조롱기 어린 주정뱅이의 눈들, 갈망하는 자의 입술, 추적 당하는 자와 괴로워하는 자, 구도(求道)하는 자와 방탕아 그리고 사라져 버린 인간의 입술. [...] 그리고 더 멀리, 더 깊이 이 모든 얼굴들 뒤에는 더욱 옛날의 더 깊은 곳에 있는 보다 늙은 얼굴들이, 그리고 인간 이전의 얼굴, 동물의, 식물의, 돌의 얼굴들이 잠자고 있었다. 그것은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간이 죽음의 순간에 자기 전생과 온갖 세상에 존재했던 청춘시절의 모든 형상들을 다시 한번 일장춘몽과도 같이 순간적으로 회상하는 것과도 같았다."(III, 610 f.)
클링소어와 마찬가지로 고빈다도 각성한 친구 싯다르타의 얼굴에서 "다른 얼굴들, 기나 긴 일련의 수많은 얼굴들, 수백의, 수천의 얼굴들로 이루어져 흘러가는 얼굴의 강물을 본다. 이 모든 얼굴들은 왔다가는 사라져갔지만, 이 모두가 동시에 거기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얼굴들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워졌지만, 이 모두가 동시에 싯다르타였다."(III, 731)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의 주인공 하리 할러 역시 영혼의 다양성에 대한 동양 종교적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창조되는 모든 존재의 지속적인 소멸과 재 탄생에 대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충만한 개성적 인간들을, 전체의 세대를, 전체적 현현의 모습들을 자신의 가슴속에" 끊임없이 지니고 다닌다.
III. 크네히트 영혼의 현현(顯現)들
헤세의 불교적 윤회에 관한 사상, 영혼의 불멸성과 지속적인 변화에 대한 믿음은 크네히트 Knecht 영혼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 모습에 관한 기록들, 즉 『유리알 유희』에 서술된 "이력서들 Lebenslaeufe"이라고 이름한 다섯 개의 기록적인 작품에서 가장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크네히트 영혼의 현현(顯現)에 관한 이력서들을 집필할 당시를 회상하면서 헤세는 1955년 1월 판비츠 Rudolf Pannwitz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들의 종교 사상적 의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 마음속에 첫 번째 불꽃을 일으킨 생각은 견고한 것이 흐름 속에 존재하며, 전승(傳承)과 정신생활의 연속성에 대한 표현 형식으로서의 현현[환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니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 여러 해 동안 한 개인이면서도 초시간적인 이력서에 대한 비젼이 나를 엄습했지요. 즉 나는 여러 번에 걸쳐 환생함으로써 인간사의 위대한 시대들을 함께 살아가는 한 인간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헤세가 내면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늘 그의 마음속에 깃 들어 있던 동양적 환생에 대한 믿음이 역사 이전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25세기라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전개되는 크네히트 영혼에 대한 다섯 편의 이력서를 구체적으로 구성하고 표현하고 그 내용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본질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헤세가 언젠가 한 번 "내 영혼은 영원토록 계속해 존재하리라. 그러나 의식은 하지 못하리라" 하고 말한 바처럼, 크네히트의 영혼은 결코 끝나지 아니하고 이별과 새로운 시작, 죽음과 다시 태어남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명랑한 준비를 갖춘 채 우주계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계속 걸어가며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현현하고 있다. 헤세에게 있어서 영혼 환생의 길은 동양의 전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윤회 사상을 상기시켜 주는데, 이는 "개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단면들은 물론 개개의 영혼, 즉 자아에 대한 일련의 환생이기도 한"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서 수행된다. 크네히트가 유고로 남겨놓은 "단계 Stufen"라는 시는 바로 다섯 개의 이력서에 구체화된 크네히트 영혼의 현현 과정들을 잘 요약하고 있는 바, 그의 영혼은 어느 한 공간이나 어느 한 시간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한 단계 또 한 단계를 계속 걸어가며 언제나 새로이 형성되고 구체화되어 현현하는 것이다.
"모든 꽃잎이 시들고 청춘이 나이 앞에 사라져가듯,
인생의 모든 단계와 모든 지혜,
그리고 덕망도 모두 시기가 되어 꽃이 피며,
또한 영원히 지속되어서도 아니 된다.
생명으로의 소명(召命)이 있을 때마다 마음은
이별과 새로운 출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느니,
슬퍼하지 않고 씩씩하게
다른 새로운 조건 아래 적응하기 위하여.
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깃 들어 있어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가 살아가도록 도움을 준다.
명랑하게 우리는 한 공간 한 공간을 통해 가야할지니,
어디에도 고향처럼 매달려선 안될 것이다.
세계 정신은 우릴 구속하고 제한하지 않으며,
한 단계 한 단계 우릴 들어올려 폭넓게 하고자 한다.
어느 한 생활권에 가정처럼 아늑하게 안기게 되면,
우리는 바로 무기력(無氣力)의 위협을 받나니,
출발과 여행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者)만이
마비시키는 습관을 헤어날 수 있도다.
죽음의 시간까지도 우리를 젊게
새로운 공간으로 보낼지도 모르나니,
우리에 대한 생명의 소리는 결코 그치지 않으리라....
마음이여, 그럼 이별을 하고 건강하여라! (VI, 555 f.) "
1. 『기우사 Der Regenmacher』에서의 첫 번째 현현
크네히트의 영혼은 "수 천년 전" 선사시대의 모계사회에서 어느 한 마을에 사는 원시적 종족의 "기우사(祈雨師)"로 처음으로 이 세상에 현현한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의 출신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년 크네히트에겐 부모가 없었고, 그는 고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면에 깃 든 신비에 가득 찬 자연의 원초적 힘들과 더불어 자라나며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에 감싸인 채 말없이 살아가는 전임 기우사인 투루는 훗날 그를 자신의 후계자인 동시에 사위로 받아들인다. 기우사가 된 크네히트는 자연과 그 법칙과 변화에 진정으로 결부되어 있었고, 그는 "결코 자연에 반대하거나 대적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경외심을 가지고 자연에 헌신하였다."(VI, 575) 이로 인해 그는 일기를 예언할 수 있었고, 자연의 법칙들과 유희하고 날씨에 대해 명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달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바치고 가장 간절히 달을 연구하였다. 이를테면 "달에 관한 학문[월학(月學)]에, 즉 달의 형상이나 작용들이 어떠한지, 달이 언제나 어떻게 커지고 또다시 사라져 가는지, 죽은 자들의 영혼에 의해 어떻게 뒤덮이고 있으며, 새로이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이전 영혼들을 새로운 탄생으로 휘몰아가고 있는지"(VI, 567)에 관한 학문에 헌신하였다. 이렇게 달이란 인간 생명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에게는 영원한 죽음과 동시에 영원한 새로운 탄생의 상징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달이 커지는 것과 사라져 가는 것은 인간의 죽음과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VI, 576)
그의 스승이며 선임자인 투루에게도 달이란 태초적 고향, 인간 정령들의 원천 혹은 태초적 어머니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정신은 달에게로 날아가고, 얼마 동안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달로부터 다시 지상으로 되돌아와 새로이 태어난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투루는 자기 후계자인 크네히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으면 내 정신은 달 속으로 날아간다네. 그때에는 자네는 어른이 될 것이며 아내를 맞게 되지. 내 딸 아다가 자네의 아내가 될 거야. 그 애가 자네의 아들을 낳게 되면 나의 정신은 다시 돌아와 자네 아들의 내면에서 살 것일세. 내 이름이 투루인 것처럼 자네는 그 아들을 투루라고 부르도록 하게." (VI, 568) 그리고 크네히트의 자식들 중에는 실제적으로 투루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있었으며, 분명 그의 형상 속에서 옛날의 투루가 달로 떠났었던 죽음의 여행으로부터 다시 돌아와 전생에서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비를 내리게 하는 마술사이며 기우사로 지상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백발의 노년에 이르렀을 때 기우사 크네히트는 운명적으로 죽음에 내맡겨진 채 일 년간을 더 살아가는데, 그때에는 "천지(天地)의 조화가 비상한 힘과 음모를 지닌 마귀들에 의해 미쳐버리고 방해를 받게 된다." (VI, 589) 하늘에는 이상스럽고도 지속적인 별들의 비가 내리는데, 이는 몸서리나는 고요 속에서 불타오르고 다시 꺼지면서 어디론가 밑바닥도 없는 곳으로, 즉 무(無)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마귀들은 크네히트에게도 저항한다. 그에겐 더 이상 아무 것도 성공되는 일이 없으며, 이 어려운 시기에 그의 신통했던 마술력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연 본능적인 기우사와 자연과 그 힘들 사이의 조화와 완전한 일치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술사와 기우사로서의 크네히트에 대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하늘과 공기와 자연의 질서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태고적 모계 종족의 이교적 믿음에 따라 음흉한 마귀들과 화해하고 그 종족에게 다시금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네히트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희생자로 나서며 기꺼이 죽는다. 그는 자기 아들인 동시에 새로운 기우사인 투루에게 그의 시신을 불태워서 그 재를 들판에 뿌리라고 위임한다. 그리고 "두 개의 축성된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는 장엄한 의식이 투루가 수행한 첫 번째 관리로서의 행사가 되었다." (VI, 605)
이로써 인간들과 자연에 봉사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영위했던 기우사 크네히트의 첫 번째 존재는 다시금 태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다른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자연과 우주만유와의 합일로 변화하는 것이다.
2. 『고해 신부 Der Beichtvater』에서의 두 번째 현현
기우사로서 한 세상을 살다 간 크네히트의 영혼은 이제 초기 기독교 시대, 즉 "성 힐라리온이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아직 살아있었을 때인" (VI, 605) 기원 후 4세기에 요세푸스 파물루스라고 하는 은둔자적 "고해 신부"로 다시 태어난다. 파물루스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첫 번째 이력서에 서술된 크네히트의 영혼이 새로운 인간으로 나타난 윤회적 현현인 것이다. "하인" 내지 "봉사자"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로 된 "파물루스 Famulus"란 이름이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크네히트 Knecht"와 동일한 영혼의 새로운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세상에서의 인생에서 파물루스, 즉 크네히트의 영혼은 오랜동안 속세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한다. 서른 여섯 살의 나이에야 비로소 그는 아름다운 도시 생활을 던져 버리고 황량한 사막에서의 초라한 기독교적 참회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그는 그 당시의 수많은 은둔자들과 같이 살아간다. "빈곤과 이웃사람에 대한 사랑을 수행하면서 그리움에 찬 아르스 모리엔디, 즉 죽음의 기술, 속세를 망각하고 자기 자아를 죽이는 은거자로, 또한 구세주에게로, 광명과 영원히 시들지 않는 것으로 죽어 들어가는 은거자로" (VI, 606) 살아간다. 백발이 성성해지기 시작할 때에야 그의 내면에는 하나의 특출한 천부, 즉 "청문(聽聞)의 재능"이 꽃피어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유명한 고해 신부가 되며, 여러 해 동안 도처로부터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는 그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고해와 참회를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 파물루스는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죄에 대해 회의하고 절망한다. 그의 삶은 구역질나는 것이 되고 그의 믿음은 몰락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끝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는 이제까지의 직책과 임무로부터 도망치며, 디온 푸길이라고 하는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영혼의 심판자에게로 달려가서는 그에게 자신을 고백하고 참회하며 자기 죄에 대한 심판과 벌을 받고자 한다.
이와 동일한 순간에 보다 더 늙은 은거자로서 심판자이며 처벌자이며 정돈자인 디온 푸길 역시 요세푸스와 같은 내면적 고통을 체험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신부에게 충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성스런 임무와 활동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친다. 그 두 사람은 도중에서 서로 만난다. 자신의 내면적 절망을 우선 숨기고 있던 디온이 요세푸스의 죄에 대한 고해를 청문하고는, 그의 간청대로 요세푸스를 제자로 삼아 자기 암자로 데리고 간다. 여기에서 요세푸스는 새로이 신과 정신과 세상에 대한 경건한 봉사를 배우며, 자신의 신앙과 기독교도와 고해사로서의 생활에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리고 백발의 노인 디온이 세상을 떠나자 요세푸스 파물루스는 후계자로서 고해 신부로서의 성스런 임무를 계속해 수행한다.
이 기독교적 이력서에 있어서도 헤세는 구세주인 신의 종교 이외에 짤막하기는 하지만 영혼의 지속적인 존재에 대한, 즉 우주 속에서의 윤회에 관한 동양적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는데, 헤세 연구가인 P. B. 곤트룸은 이를 "이 세상 생명의 지속에 관한 이념"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디온 푸길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무덤을 파기 시작하면서 그는 파물루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내 무덤 위에 종려나무를 한 그루 심도록 하게. [...] 아마도 자네는 그 열매를 먹게 될 거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느 다른 사람이 먹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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