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운명은 있다라는 전제로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며는 운명은 있습니다. 이는 중생심이며 일상적인 논리이며 일반적인 삶에서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운명이 있어야 삶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修道者의 공부하는 마음으로는 운명이라는 말(글) 자체가 쓸데없은 언어의 나열입니다. 그런 경지를 일반적인 삶에 견주어서 나열한다는 것이 매우 어설픈 말장난임에 글을 쓰기에 조금은 부담이 되는군요.
우선 사전적인 운명(運命,fate)을 살펴보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一切)가 지배를 받는 것이라 생각할 때 그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 힘에 의하여 신상에 닥치는 길흉화복을 운명이라 합니다.
이 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신앙하는 것으로서 예로부터 각 지방의 신화(神話)나 종교 및 철학사상에 나타납니다. 인간이 그 힘, 또는 법칙에 대하여 이해하는 점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이것을 표현하는 데는 상당한 복잡성을 띱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人들은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세 女神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탄생을 지배하며 생명의 실인 클로토(Klotho)와 인간의 일생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라케시스(Lachesis),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여 그 생명의 실을 끊어버리는 아트로포스(Atropos)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의 상태를 안 인간은 의지(意志)의 힘을 부정하고 ‘체념(諦念)’으로 향하여 무슨 일이나 고민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탈피하여 정적주의(靜寂主義)로 빠지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경우는 그 운명의 힘 속에 신의 섭리와도 비슷한 의지의 존재를 믿고 그것에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데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운명을 깨달음으로 해서 세상을 비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낙천적이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운명을 안다는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여하한 형태로든지 그곳으로부터의 해방 ·탈출의 수단을 강구하게 합니다. 운명에 대한 관념에는 형이상학적 경향이 강한 것과, 인도(불교)의 인과응보에 대한 사상처럼 종교적 ·도덕적 요소를 다분히 포함한 것이 있으나 확실하게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인간의 운명을 예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신앙입니다.
운명은 인간 존재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기는 하나 근대인의 운명관은 고대 중세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자연과학의 발전과 인간성 존중 사상에서 그로부터의 해방과 극복에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오랫동안 ‘체념’을 일종의 미덕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아직도 운명은 개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 운명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간은 과연 운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인가?
인간이 운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운명을 인정하고 그에 따랐다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이며 인간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으로 인간은 자연을 인간에 유익한 방향으로 활용할 줄 알게 되었으며, 물질의 도전에 대하여 인간은 물질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풍요로운 물질 문명을 향유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제한과 한계의 도전으로부터 해방의 역사입니다.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하여야 했으며 노력해야 했습니다.
제한과 한계의 도전으로부터 무사히 응전을 마친 뒤에는 응전을 위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게 되면서 점차 여유와 여가를 추구하게 되었고 결국 인간은 노동이라는 해방의 도구에서 마저 해방되고자 추구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제한과 한계라는 원초적 운명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극복되어 지고 인간의 의지대로, 인간의 욕구대로 극복되어 왔으며, 그러기에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원초적 운명이란 관념적인 것에 불과할 뿐 결코 현실적으로 경험되어질 수 없는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정확하게 인식되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자 갈망하고 노력합니다. 물질적, 정신적, 사회적인 심지어 윤리적인 제약에서 마저 해방되고자 합니다.
이러한 해방에의 갈망이 존재하는 현실적 보편성과 어울리고 그러한 보편적 방법을 통하여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경우 보수적이라고 칭하며, 현실적 보편성에 대한 불만과 획기적인 세상을 추구하며 보편적 이념과 방법으로부터 벗어나 또다른 세상을 추구하게 될 때 이를 진보적이라 칭합니다.
그럼 개인의 삶은 전반적으로 어떠한 색깔을 띄고 있을까?
인간의 역사는 보수적이었을까? 진보적이었을까?
인간의 역사에서 보수든 진보든 그 무엇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보수는 진보에 의해 좌절하였으며, 진보는 보수에 의해 좌절하였습니다. 영원한 보수는 존재할 가치가 없었으며, 인간은 이로부터 해방을 갈망했습니다. 인간은 정체되어있기를 거부하였으며 진보하기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의 내가 아닌 또다른 내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하루하루 다람쥐 바퀴 돌리듯 반복되고 순환되는 삶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회의합니다. 좀 더 획기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은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 또한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현재의 삶이 아닌 혁명적인 환경에의 적응을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떨져 버리지도 못합니다. 이 얼마나 자기 모순적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나의 운명이란, 본질적으로 주어진 운명이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태어남 그 자체가 죽음에 대한 응전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발전의 역사였듯이 우리 개인의 삶도 발전적 삶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간이 주어진 한계와 제한을 극복하며 살아왔듯이 한 개인도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와 제한을 극복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운명이란 하얀 백지입니다. 운명이란 아무 색도 지니지 않은 캠퍼스입니다. 그 무엇인가 쓰여지도록, 그 무엇인가 그려지도록 주어진 것이 운명입니다. 우리는 이 백지에, 캠퍼스에 그 무엇인가를 쓰고 그리기 이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인간이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한 개인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운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운명이란 우리네 삶의 최소한을 말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지도 발하지 않으며, 아무런 욕망도 가지지 않을 때, 그리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제한과 한계,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게 씌워 버린 굴레(사회적, 윤리적 억압)가 아닌 자연 상태 그대로의 제한과 한계에 직면하였을 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입니다.
운명은 결과물이 아니라 원래 있던 상태 그대로일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빈손에 한 몸이었던 것, 아무런 권력도 물질도 소유하지 못하였던 그 상태가 운명입니다.
당신은 나를 소유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소유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원래의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은 한 번 소유한 것에 대한 100% 원래 상태로의 회귀는 불가능한 것처럼 한 번 소유한 것은 그 이전의 상태로의 전환은 불가능합니다.
운명이란 밖에서부터 찾아오는 것이므로 평범한 생각으로 그것을 알 수는 없다. 인간은 고작해야 그럴듯한 것을 유추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인데, 운명이란 그럴듯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운명은 예측할 수 없이 돌연 찾아온다. 결코 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선한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오고, 악한 사람에게 불행이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운명은 저곳에서 오는 것이지, 이곳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왜 찾아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옛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알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왔지만, 그것은 여전히 장막(帳幕)에 싸여 있습니다. 운명은 오직 시간이 되어서 그 장막이 벗겨질 때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실 운명을 알 수 있는 지혜는 생명 속에 내장되어 있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련만, 인간은 이 힘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인의 수행은 세상에서 무엇을 배우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잠재되어 있는 힘을 일깨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옛 성인은 운명을 알기 위해서는 사물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또한 인간은 원래부터 사물의 뜻을 알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 스스로의 지혜를 거부하고, 보고 배운 한정된 지혜만을 추구하다 보니, 운명의 모습을 알 길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수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운명의 그림자나마 살펴볼수 있는 지혜를 차츰 축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인간이 운명의 그림자를 살펴볼수 있는 지혜를 학문으로 확립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본연의 지혜를 조금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학문은 자칫하면 영원히 운명의 본질을 깨달을수 없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점을 확연히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쩌랴! 성인(聖人)의 뜻은 알 길이 없고, 인간의 학문은 난무하고 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文字와 形象을 떠난 사물의 본 뜻을 깨닫고 생명 근저에 있는 운명의 지혜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역을 빌려보며는 ' ...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글로써 말을 다 표현할수 없고, 말로서 뜻을 다 표현할수 없으니, 성인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인가(子曰 書不盡言 言不盡意 然則聖人之意 其不可見乎)?
.... 공자는 말하였다. 성인이 주역의 상(象)을 세워 뜻을 다 표현했으며, 주역의 괘(卦)를 만들어 사물의 본연의 뜻을 다 표현했고, 주역을 설명하여 할 말을 다 하였고, 변하고 통하는 이치로써 이로움을 다 밝혔고, 천하를 감응(感應)케하여 신묘(神妙)함을 다 이루었다(子曰 聖人立象以盡意 設卦以盡情僞 繫辭焉以盡其言 變而通之以盡利 鼓之舞之以盡神).'
사람의 본성인 법성에는 가히 얻을 것이란 한 물건도 없습니다.
지음도 없고 함[爲]도 없습니다.
인과도 없고 선악도 없습니다.
그러니 운명이라는 숙명적 타성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본성을 미혹하여 쓰고 있는 범부에게는 지음도 있고 인과도 있고 선악도 있습니다.
지은 바 행위의 누적인 업도 있고 업의 과보인 업보도 있습니다.
운명이 인간 스스로가 변경시키지 못할 숙명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라면 원래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 자신 밖에서 작용해오는 위압적 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나 인과나 선악은 인간 자신이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부 인간은 기나긴 미혹의 생을 계속해 살면서 그 가운데서 분단된 금생만을 생이라고 의식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금생이라는 짧고 좁은 면만을 두고 생각하게 되므로 보다 먼 과거의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른 결과적 과보를 자신 밖에서 오는 작용으로 잘못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짧은 기간에 일시적으로 지은 생각으로 저항할 수 없는 과보로부터의 타성적 힘을 체념으로 받아 들이고 그것을 운명이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운명적인 힘이 있기는 하나 운명을 지은 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동시에 현재도 스스로의 지혜로써 선택하고 용기로써 결단하여 새로운 운명을 지어갈 주체적 권능을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운명이 운명의 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운명이 이런 것임을 안다면 설사 운명적 사태를 당하더라도 결코 체념하거나 저주하거나 당황할 것이 아닙니다.
원래로 갖추어진 불성의 창조적 위력과 권능을 돌이켜 주어진 운명적 여건을 새로운 창조, 정진의 발판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가며 사는 삶일 뿐이지 그것이 어떤 존재로 유형의 형태로 우리에게 존재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중생의 어리석은 눈으로는 운명에 의하여 산다고 할것이지만 깨달은이의 삶은 운명을 만들어가며 운명과 상관없이 이세상을 이끌어 가며 살아갈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