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특집 전법과 재건의 역사 불사 2. 현대불사의 주역 - 정우 스님
등록일 : 2020-06-03 동영상 

전법과 재건의 역사 불사 2. 현대불사의 주역-정우 스님

“중생이 부처님 가르침 만나도록 돕는 게 불사하는 이유죠”
월하·벽안 스님 배려로 통도사서 첫 대중법문…대중포교 원력세워
1985년 서울 양재동에 천막법당 짓고 4년 노력 끝에 구룡사 건립
전법도량 발원으로 국내외 포교당 20곳 설립…도심포교 모델 제시



1976년 가을, 통도사 중진스님이 정우 스님을 찾았다. ‘오늘 대중법회에서 법문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른스님들과도 이야기가 된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건넸다. 군에서 제대한지 3개월이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사병으로 입대해 26사단 군법당 ‘호국황룡사’ ‘호국일월사’를 직접 짓고, 장병들 앞에서 법문을 했어도 어른스님들이 즐비한 통도사 대웅전에서의 법문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스물다섯 정우 스님에게 놓인 첫 난관이었다.

이날 대웅전 풍경은 스님이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법회에 참석한 신도는 대웅전을 넘어 앞마당까지 장사진을 이뤘다. 법당 중앙에는 벽안·월하 노스님을 비롯해 중진스님들이 좌정하고 있었다. 발길을 돌리려했지만 퇴로는 없었다. 법회가 시작되고, 대중은 청법게를 합송했다. 일흔을 넘긴 노스님도 손자뻘 되는 20대 젊은 법사에게 예를 올렸다. 오금이 저렸다. 준비한 법문자료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긴장한 탓에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법회가 끝나고, 정우 스님은 노스님들 처소로 향했다. 하늘같은 어른스님들 앞에서 ‘아는 체’를 했으니 황망함에 참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우 스님을 마주한 노스님들은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월하 스님은 “법문 좋았어”하며 등을 두드렸고, 벽안 스님도 “내 평생 법문을 듣다가 박수를 쳐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며 웃음을 내보였다.

“군대를 막 갔다 온 ‘햇중’이 법문을 잘했으면 얼마나 잘했겠어요. 어른스님들의 배려였던 것이죠. 그런 따뜻한 울타리가 돼 준 어른스님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겁니다.”

그날의 경험은 훗날 정우 스님이 대중포교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이 됐고, 어른스님들의 배려와 덕담은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1985년 봄 어느 날, 정우 스님은 월하 스님의 부름을 받았다. 통도사 서울포교당 구룡사 주지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구룡사는 1979년 통도사가 서울 가회동 한옥촌에 위치한 일본식 2층 가정집을 매입한 건물이었다. 주로 서울에 올라온 통도사 스님들의 숙소로 활용됐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고, 포교당으로서도 부족함이 많았다. 이 무렵 정우 스님은 미국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외에 나가 견문을 넓히고 미국에 한국불교를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노스님의 간곡한 당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노스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것이 정우 스님과 구룡사의 첫 인연이었다.

주지소임을 맡은 정우 스님은 구룡사 확장 불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불사는 여의치 않았다. 사찰 인근의 한옥을 매입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청와대 인근에 위치한 탓에 개발허가를 받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포교당과 인접한 집에서 구룡사를 매입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구룡사를 이전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정우 스님은 강남행을 추진했다. 이 무렵 서울 강남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개발이 한창이었다. 한강 주변을 중심으로 대규모 개발이 진행됐고, 도시계획에 따라 강남 일대는 도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6개월여간 사찰이전 터를 물색하던 스님은 양재동 일대를 사찰부지로 낙점했다. 양재동 일대는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아 여전히 논과 밭이 즐비했지만 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넓은 터는 부처님 도량을 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회동 구룡사를 매각한 돈과 통도사의 지원으로 양재동 일대 650여평을 매입했다. 토지매입에만 거액이 들어간 터라 법당을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맨몸으로 군법당 2곳을 지었던 것처럼 신심과 원력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남대문시장에서 대형 천막을 사서 20평 규모의 법당을 짓고 바닥에 비닐과 스티로폼을 깔았다. 주변의 큰 길목마다 ‘대한불교조계종 통도사 서울포교당 구룡사’라는 현판을 매달았다. 구룡사 천막법당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스님의 ‘도심포교’ 발원은 간절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스님의 목탁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목이 메고 팔다리가 저려 서있기조차 힘들었지만, 스님의 염불과 목탁은 멈추지 않았다. ‘젊은 스님이 허허벌판에서 천막을 짓고 기도한다’는 소식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기도소리가 커질수록 스님의 불사원력에 공감한 불자들도 늘어갔다. 그러길 2년. 정우 스님은 천막법당을 정리하고 그곳에 100평 규모의 가건물 법당을 마련했다. 신도들의 십시일반으로 작은 법당은 지을 수 있었지만, 정우 스님은 먼 미래를 내다봤다. 구룡사가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포교당이어야 하고, 신행과 문화가 공존하는 복합공간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당시 서울 강남에서는 보기 드물게 구룡사를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로 설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외부는 통도사 적멸보궁 사리탑을 본떠 만들되, 내부는 냉난방을 비롯해 방송, 컴퓨터 시설 등 현대설비를 갖춰 신도들의 편의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시민선방과 유치원, 극단 ‘신시’를 위한 공연장까지 내부에 포함했다. 구룡사 불사에서 이목을 끌었던 것은 만불전이었다. 법당 2~4층을 터 조성한 만불전은 당시 국내 법당 중 최대 규모였다.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우 스님의 기도정진은 멈추질 않았다. 100일 기도, 1080배 참회기도를 마다않고 매일같이 부처님 전에 엎드리고 또 엎드렸다. 1989년 구룡사 만불보탑 준공을 끝으로 마침내 구룡사의 긴 불사는 마무리됐다. 오늘날 도심포교당의 모델로 꼽히는 구룡사는 ‘서울 강남에 여법한 부처님도량을 만들겠다’는 정우 스님의 원력이 만든 결실이기도 했다.





구룡사 불사를 회향한 정우 스님은 전법도량 건립의 원력을 다시 냈다. 1990년대 들어 수도권 과밀을 억제하기 위한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자, 스님은 신도시마다 부처님 도량을 건립하기로 했다. 일산 여래사는 그 가운데 대표적이었다. 조계종은 1992년 일산 신도시 개발에 따라 종교용지 800여평을 배정받았지만 이를 받을 마땅한 사찰이 없었다. 당시 총무원장 의현 스님은 정우 스님의 불사원력을 익히 알고 있었고, 정우 스님에게 이곳에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정우 스님은 이를 흔쾌히 받았고, 1997년 터파기를 시작으로 여래사 불사에 착수했다. 비록 불사 중간 IMF 구제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스님은 기도로 이를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4년의 노력 끝에 2000년 일산 여래사를 완공했다. 이후에도 스님은 ㈜건영의 도움을 받아, 건영이 짓는 아파트 단지의 상가건물을 매입해 포교당을 하나하나 지어나갔다. 서울 문정동 법계사, 부천 중동 서래사, 인천 보명사, 평택 지산사, 분당 연화사·장안사, 평촌 보림사 등이 모두 이 무렵 지어진 포교당이다. 또 인도와 캐나다, 호주 등에도 포교당을 건립했다. 스님이 지난 30여년간 직접 건립한 포교당만 20곳에 달한다. 최근에는 미국 뉴욕 원각사 건립불사도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정우 스님은 “불사란 부처님 일이고, 부처님 일이란 중생을 위한 것”이라며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불사의 목적이다. 내가 부처님 전법도량을 짓는 가장 큰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정우 스님의 불사원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정우 스님은
홍법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8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71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1985년 통도사 서울포교당 구룡사 주지를 맡아 도심포교당을 설립했으며, 11~14대 중앙종회의원, 1994년 총무원 총무부장, 2007년 통도사 주지, 2013년 군종특별교구주지, 2017년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다.

2011년 개인소유 사설사암을 공찰로 전환하고 15교구말사 공부를 말끔히 정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계종 종정상을, 2017년 제29회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