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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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도대체 이놈이 무엇인가
화두에 대하여 많은 말이 있지만 간단히 요약하면은 자기 마음 하나 깨닫는 것 뿐이다. 부처님께서 많은 법을 설하신 것도 단지 마음 하나 깨달으라고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말하기를 해인사 장경각의 경판은 다 마음 심(心)자 하나 해석하는데 불과하다고 했다. 마음이란 이름만 들었지 보기 어럽고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혹 있다는 장소를 머리에 생각해도 안되고 배에, 가슴에, 몸 전체에 있지도 않고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그저 떼어 놓고 말로만 마음이라 한다. 그러기에 깨달으려면(마음 있는 자리를 아는 것) 무수한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신체는 법계(온 세계를 둘러 싸고도 남는 것)와 같다. 인간의 이 작은 체구에서 그런 거대한 이치를 포함하고 있지만 깨닫기 전에는 모른다. 깨달은 후에는 마음쓰는(가는) 범위가 이렇게 넓다. 이런 넓은 자리가 머리에, 배에, 가슴에 있다고 해도 맞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 몸하나를 체험해 보더라도 아플 때나 가려울 때의 감각은 어디를 만져 봐도 느끼는 것은 같지 않은가. 그러기에 어느 한 부분에 있다고 하면 맞지 않다. 어디고 다 통하기 때문이다. 깨친 분상에서 보면 범위가 온 세계를 둘러 싸고도 남는다.

부처님 당시에는 근기가 수승(殊勝)하여 마음이나 행동으로써 가르치면 다 알아들었는데, 차츰 차츰 내려 오면서 근기가 하열하여 그렇게 해서는 모르고 알기도 어려워서 염불(念佛), 참선(參禪), 주력(呪力), 간경(看經), 기도(祈禱) 등의 여러가지 방편으로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염불, 참선 두 가지를 이용했다. 옛날에 근기가 수승했을 시에는 따로이 앉아서 하는 게 아니고 일상 생활을 통해 오고 가면서 깨닫고, 알고 했다. 그 후 근기가 약해져서, 그냥 앉아 있으니 그래도 잘 알기 어려워서 화두법이 생겼다.

‘화두’란 글자 그대로 말의 머리다. 누군가 요긴한 말을 하는데 이를테면 미리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요지가 어디에서 무엇에 초점(마음 있는데까지 들어가는 것)을 두고 말하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아직까지 초첨이 나오기 전에, 말을 딱 끊어버렸다면은 듣는 사람이 그 얼마나 궁금해 하겠는가. 무슨 말을 하다가 하지 않고 끊어버리고 있는게 바로‘화두’다. 말을 하다가 딱 끊어 버리니까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올까 의심이 생긴다. 이와같이‘화두’도 마찬가지다.

‘화두’는 1700여 가지나 된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말은 달라도 뜻은 같다.
예를 들면은“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물었을 시에“마당 앞에 잣나무다~. 庭前栢樹子\”라고 하고 또“모든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一切衆生皆有佛性\”라고 해놓고 마당에 개가 지나가기에“저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狗子無佛性他\”하니까“없다~無\”라고 답하거나 아니면은“어떤 것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乎\”하니“마삼근~麻三斤\” 이라고 답한 것에서 보면은 이상하다 해도 이만 저만이 아닌 것이 아닌가. 이것은 완전히 뚱단지 같은 답이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 곳에 왜 그런 답을 했을까? 하고 의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의심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고 다른 생각을 못하게 붙들어 매어 놓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대답을 왜 했을까? 하는 것에 마음을 붙들어 놓으면 된다.
‘화두’에 의심을 걸어서 자꾸 의심만 하고 앉아 있으면, 그것을 하기 위해 딴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비록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딴 생각을 하게 되지만 자꾸 의심을 챙겨서 조금씩 나아가면 없어지곤 하니까.

-불기 2530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 특별강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