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라 하는 것은 늘 하는 소리이지만 자기의 심성자리를 알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히 체득하는 일, 또한 체득하여 아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이란, 말은 쉬워도 쉽지만은 않 은 것이다. 자신의 심성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당체를 깨닫지 못해 한 철 한 철 무상함만을 느 껴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九旬禁足成何事 구순의 금족이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냐 弄得鐵牛建道場 철우를 희롱해 얻어 도량을 세우기 위해서다. 三更昨夜飛身出 어젯밤 삼경에 몸을 날려 출하니 孔孔電聲偏十方 구멍맘다 번개소리 시방에 두루하도다.
보통 선가에서는 심성자리를 비유하는 말로 '철우(鐵牛)'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하여 철우를 희롱해 얻는다는 말은 이리저리 자신의 심성자리를 궁구한다는 것으로 만약 어떤 이가 자신의 철우 를 찾아 궁구한다면 그에게는 놀라운 소리가 널리 떨쳐질 것이고, 시방에는 두루 짐승들의 울부짖음 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자기가 어떠한 견처를 보고 힘을 얻고자 한다면 그에 합당한 절차와 환경에 맞도록 자신을 갖추어 나가야 할 필요 또한 있기 때문이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를 한다든지, 무(無)자, 시심마(是甚) 화두를 한다든지 그 각각의 화 두는 달라도 뜻은 모두 같은 것이다. 이 모두는 마음 속에 희미한 초생달이 떠오름을 말하고 있는 것 이기 때문이다.
형상 없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이 무엇인가? 형상조 차 없는 자기 자신이 그 그림자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심성자리에 대해 말하고, 그 모양이라든지 그 행 동을 이야기 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그러나 평소 보지 못하고 익숙해 있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명찰 은 그것을 명확히 밝혀 보고자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一株無影樹 한 그루의 그림자 없는 나무요. 無根處處生 뿌리가 없으며 곳곳에 난다. 鐵牛孔孔處 철우가 크게 우는 곳마다 夜半一輪明 밤은 깊어 달은 휘영청 밝도다.
자기의 심성자리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체득한 자에게는 일륜의 달이 환히 밝아온다. 그 마음속 광 명에는 밤낮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광명을 찾아 나서는 데에는 하나의 형식이 요구된 다. 우리의 일상 8만 4천가지 세세한 행동은 진제(眞諦)를 찾아나서는 길이 되며, 과실은 껍질이 있 으므로써 속이 여물게 된다. 우리가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들에 합당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에 따르자면 우리의 좌선도 하나의 형식인 것이다.
一株無影樹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 移就火中栽 불 가운데 심어 키우니 不假三春雨 삼춘우를 가자하지 않아도 紅花爛漫開 붉은 꽃 피어 찬란하도다.
곧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는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과일을 예로 들면, 과일은 그 껍질을 먹을 수 없지만 그 껍질로 인하여 속이 알차게 익어가는 것과 같고, 참선을 예로 들면 앉아 있는 자체는 형식 즉 속체이며, 그 속의 깨달음의 실제 그것은 진제인 것이다.그러므로 모양은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형식으로 인하여 내용이 있으므로 형식이란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곧 화 두를 들고 틀고 앉아 있는 자체는 모양, 그 속체이며 그 속에서 깨침으로 인하여 참구한 바는 곧 진 제가 되므로, 진제와 속제는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것이다.
-야단법석 253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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