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여, 그대는 지금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있는가.”
가슴의 정광명이 활동하게 되었을 때 공성은 보다 명료해집니다. 내면의 번뇌장과 소지장은 대상의 무자성만으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의식은 날카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수보살이 들고 계신 취모리 검, 지혜의 양 날개입니다. 명 증 득의 거친 의식의 상태에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습니다. 붓다의 지혜를 얻기까지는 지혜의 원인이 되는 원과 조건을 면밀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 원인의 지혜가 공성이라 한다면 그 원인과 조건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법신과 색신이 둘이 아닌 지위를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행자는 법신과 색신의 조건이 되는 원인을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존 수행이며 공성 수행입니다. 인간이 지닌 미세한 기운의 기심은 분리되지 않고 꾸준한 하나의 기운으로 작용합니다. 티베트불교의 금강승에서는 처음 밀교 수행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이르기를, 책상 위에 모래를 두고 기심을 다스린 손가락의 기운으로 그 모레를 날릴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도 합니다. 배꼽의 열 기운을 다스리는 뚬모 수행을 하면 어느 경지에 이르러 더 이상의 추위를 느끼지 않게 된다고도 하였습니다. 단전에서 발생시킨 열의 기운을 수행력으로써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다른 생명체로 옮기는 유체이탈의 둥죽 수행법은 밀교뿐만 아니라 외도에서도 행해집니다. 이상과 같이 이론적으로 간단히 설명하여 예를 들었지만 이는 반드시 스승의 지도하에 행해져야 하며 수행자의 자량 정도 역시 면밀히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붓다의 법이란 오로지 교설과 수행뿐입니다. 사원을 건립하고 탑을 세우는 것은 붓다의 법을 보존하는 최상의 방편이 아닙니다. 오로지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헤아리며 신 구 의 삼업을 다스리고 비로소 내면의 번뇌가 줄었을 때 그 경계가 바로 붓다의 법을 수승하게 따르고 있다 일컬을 수 있습니다. 나란다 승원에서도 금강승 수행이 있었으나 철저히 비밀리에 전수되어 크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반면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밀교의 수행법이 많은 폐단을 낳은 것은 인정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지혜를 보다 향상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공성 본연의 상태에서 ‘아라바자나’ 문수보살의 희고 붉고 푸른 ‘옴 아 훔’을 정수리와 목 그리고 가슴에 각인해 봅니다. 지혜는 반드시 타당한 논리로 합리적인 사고를 하도록 하게 하는 근원입니다. 사람이 지닌 특별한 인지 능력과 사고 능력으로 말미암아 만물의 영장이 된 것 또한 지혜로 말미암음입니다. 실제 있다고 여겨온 실집이 보다 합리적으로 본연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 이를 일컬어 지혜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귀의하오니 뛰어난 지혜를 주시옵소서.” 법이 법다울 수 있도록 무상과 무아를 올바르게 사유하십시오. 대승의 법계를 따라 보살계를 수지하여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이 자리에 제불보살님께서 현현하셨다 관상을 합니다. 본보기가 되는 열 일곱 분의 선지식과 각 종파를 아우르는 스승님께 칠지 공양을 올립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모두 오직 나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마음으로 챙깁니다. 나와 남을 바꿔 보지 않는다면 윤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마음을 제거하고 보리심에 의지하여 피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이 길에 들어선 이를 우리는 진정한 수행자라 합니다. 이제 이기심의 허물을 알았으니 이타심의 말에 올라타 피안의 세계로 갑시다. 보리심을 실천하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바가 지혜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법을 듣고 헤아려 보리심을 일으켰으니 우리에게는 진실한 신심과 공경이 있습니다. 비로소 모든 악업을 참회합니다. 중생의 선업을 수희 찬탄하며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합니다. 보리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중생을 나의 귀빈으로 여겨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길로 들어서 성불로 이끌겠노라 서원합니다. 오늘의 생은 과거의 업으로 인간의 몸을 받아 붓다의 종성으로 태어난 붓다의 아들과 딸입니다. 이는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보물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모든 중생의 근원적 갈증을 가시게 할 감로수를 마시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 세간인의 삶은 중생심이 야기하는 집착과 어리석음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법을 바로 만나 마음이 변화하고 곧은 이타심을 내고자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보살의 길에 들어서고자 합니다. 나와 더불어 중생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을 냅시다. 모든 중생이 육신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예외가 없음을 알고 무지의 허물을 알아 보살계를 수지하고자 합니다. 나라고 하는 생각을 지닌 이들을 일컬어 범부라고 합니다. 거친 의식의 단계에 있는 이들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본래 무아이며 무자성임을 보십시오. 오온을 포함한 일체의 법이 무자성임을 보십시오. “옴 쑴바와 슈다 쌀와 다르마 쑴바와 슈다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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