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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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교의 청사진(14)
2) 비 숙명론인 인과
인과간은 숙명론이 아니다. 숙명론은 일체의 득실과 성패를 운명의 신이 장악하고 있어,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인과관은 선이든 악이든 모든 과보는 자신이 지어낸다는 것이다.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한 사람은 무슨 연고인가? 전생에 가난한 사람에게 차와 밥을 베풀어준 공덕이다. 먹고 입을 것이 없는 사람은 무슨 연고인가? 전생에 한 푼도 베풀지 않은 까닭이다. 비단옷을 입은 사람은 무슨 연고인가? 전생에 스님들께 승복을 보시한 공덕이다. 용모가 단정하고 잘난 사람은 무슨 연고인가? 전생에 불전佛前에 꽃과 과일을 공양한 공덕이다”라는 게송이 있는가 하면, 「인과십래게因果十來偈」에서는 “품행이 단정한 자는 치욕을 참았기 때문이며, 빈궁한 자는 인색하고 탐욕스러웠기 때문이며, 지위가 높은 자는 예의를 잘 갖추었기 때문이다. 비천한 자는 교만했기 때문이며, 벙어리는 비방을 잘했기 때문이다.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자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수하는 자는 자비심이 많았기 때문이며, 단명하는 자는 살생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인과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앞의 두 게송 모두 인간의 빈부와 귀천, 장수와 단명, 용모의 아름답고 추함은 과거에 자신이 지은 선악의 업보로 받은 결과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타인에 의해 조종되는 것도 아니고 운명에 결정되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과관은 긍정적으로 노력하여 발전시키는 것이고, 낙관적이며 진취적인 도리라고 할 수 있다.

3)매사에 존재하는 인과
세간의 모든 현상은 인으로 생겨나고, 생겨난 그 과로 인해 또 생겨나며 만들어지니, 어떤 인을 심느냐에 따라 그 과도 달라진다. 인과관계를 가장 쉽게 표현한 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말일 것이다. 식물은 물론 식물이 아닌 어떠한 현상도 이렇지 않은 것이 없다. 선한 일을 하면 보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과보를 받지 않은 것은 아직 때가 도래하지 않은 까닭이다. 『법화경』에서 십여시十如是의 여시인如是因은 여시과如是果와 연결된다. 대중의 마음에는 인과의 업보 관념이 법률 조항의 유형적 구속보다 더욱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인과는 단순히 이론적 학문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 의식주와 타인과의 공존, 신앙, 도덕, 건강, 경제 등 모든 것에 녹아들어 있다. 그렇지만 인과를 잘못 이해하고 신앙을 통해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이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을 주십사 기도한다. 이것은 인과에 관한 그릇된 견해이다. 사실 신앙은 신앙대로 인과가 있고, 도덕은 도덕대로 인과가 있으며, 건강은 건강대로 인과가 있고, 재물은 재물대로 인과가 있다. 그러므로 몸이 건강하길 바란다면 마음을 다스려 선을 행하고, 운동을 많이 하며, 보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음을 편안히 하면 몸은 절로 건강해진다. 많은 재물을 원하면 반드시 선한 인연을 많이 쌓고, 근면하게 일하며, 신용이 있고, 지혜와 능력을 갖추어 자신을 도운 뒤에 하늘에 도움을 바라야 한다.
채식과 예불은 신앙과 도덕의 인과이다. 만약 신아의 인으로 망령되이 건강과 재물이라는 과를 구하려 하면, 잘못된 인과로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이 또한 필연적인 인과이다.

4)과보는 자업자득
『지장경地藏經』이 “조그만 악이라도 죄가 없을 것이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죽은 뒤에는 털끝만 한 것도 다 받게 된다. 아버지와 자식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가는 길은 서로 다르다. 혹시 서로 만나게 되도 대신 받지 못한다”라고 설한 구절은, ‘선악의 인과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으며, 인과의 업보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로 그 이치를 설명할 수 있다.
인과업보는 권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신神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도 아니며, 하늘이 지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주 인생의 일체를 지배하는 인과업보는 우리가 행하는 선악행위의 평가 기준이다. 인과는 종교에서 교화하는 계율이 아니라 사람이 저마다 품고 있는 만능의 자(尺)이다. 일생의 운명을 재고, 인간세계 선악의 길고 짧음을 재단하며, 자신에 맞게 미래의 나를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과의 법칙을 올바로 보아야 한다. 이번 생과 다음 생에 복과 지혜가 원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선한 인연을 널리 심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조건은 예의와 도덕, 법률이다. 그러나 가장 큰 힘은 역시 인과이다. 법률적 구속은 유형적이고, 도덕과 예의의 제약은 유한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 깊이 인과因果의 관념을 심어서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정직한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 더욱 낫다.
인과는 관념으로 똑똑히 알아야 함은 물론, 행위를 통해서도 인증되어야 한다. 나름 도덕을 갖췄다고 하는 사람들은 ‘세풍世風이 날로 못하고, 인심은 예전 같지 않다’라는 말로 현대사회를 비평한다. 어째서 세풍과 안심이 예전만 못한가? 오늘날 사회 대중에게 인과의 관념이 두루 부족한 것이 주원인이다. 인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속이고 싶으면 속이고, 욕심나면 욕심내고, 빼앗고 싶으면 빼앗고, 차지하고 싶으면 그냥 차지해버린다. 시공간의 법률은 진귀하고 만능인 법전이 아니다. 위법해도 반드시 탄로난다고 볼 수 없고, 누군가 알았다고 해도 법률적으로 반드시 제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법률적으로 들키지 않거나 제재를 받지 않는다고 해도, 인과는 작은 것 하나도 절대 놓치는 법이 없다.
도덕에 위배되는 일을 한 사람은 법률의 심판을 벗어날 수는 있어도, 양심의 심판과 인과의 심파은 벗어날 수 없다.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1294~1336: 일본 가마쿠라 말기에서 남북조 시대의 무사. 사무라이 정신의 귀감임)가 죽은 뒤 그의 옷에서 ‘비非’, ‘이理’, ‘법法’, ‘권權’, ‘천天’이라는 다섯 글자가 발견되었다. 이 다섯 글자는 ‘비논리(非)는 질서정연한 논리(理)를 이기지 못하고, 논리는 법法을 이기지 못하며, 법은 권력(權)을 이기지 못하고, 권력은 하늘(天)을 이기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 하늘이 바로 인과이며, 인과야말로 최후의 승리자이다.
부처님께서도 우리 보통 사람과 같이 생로병사를 겪으셨으며, 인연 안에 머물며 인과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았다. 인과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며 누구도 인과의 업보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사상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생명은 아주 먼 옛날부터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이어질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는 그침 없이 이어지며, 업보는 더욱 뚜렷해진다. 현재 우리의 곤궁함과 영달, 득실은 삼세에 걸쳐 있으며, 인과는 그 안에서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한 순간 뿌린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결과가 평생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길흉화복과 안녕에 영원토록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다. 그러니 어찌 한순간의 언행에도 신중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평생, 더 나아가 계속 이어질 무수한 생애를 위해서라도 ‘한순간’의 인과를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경전에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과보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는 구절이 있다. 인과는 자신의 스승이자 경찰관이다. 또한 인과는 스스로의 법률이자 규칙이다. 착한 사람은 사람한테는 속아도 하늘에게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긴 해도 하늘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늘이 곧 인과이다. 인과는 매우 공평하다. 인간불교를 제창하면서 우리는 또한 인과 사상을 뿌리내리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삼세인과관은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고난을 피해 즐거움을 찾도록 해준다. 이번 생애에 고난의 과보를 받았다고 하늘을 원망하거나 타인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내가 뿌린 빚을 갚는다는 생각을 항상 지니고 고난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악연惡緣이 선연善緣으로 바뀔 수 있다.
특히 삼세인과관을 통해 업도業道 중생은 무수한 생으로 윤회하며 서로가 권속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정도의 인식이 있다면 ‘나와 인연이 없어도 사랑하고, 타인도 내 몸처럼 가엾이 여긴다’라는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 이렇게만 하면 이번 생에 원만하고 자재로운 인생을 얻음은 물론, 다음 생에도 선취善趣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인과업보를 명확하게 깨우치면 업력을 휘둘러 자신의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