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다시보기
인간불교의 청사진(13)
불교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초목이 잘 자라도록 발밑의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밟지 않으며, 불속으로 뛰어드는 가엾은 나방을 위해 밤늦게까지 등불을 밝히지 않는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참새를 위해서는 마당에 늘 벼이삭을 조금 놓아두고, 장마철의 개미 같은 작은 곤충을 위해서 한곳에 안거하고 멀리 출타하지 않는다. 이 모두가 자비심의 발로이다.
자비도 단계에 따라 깊고 얕음이 있다. 일반 범부는 자신의 부모, 처자, 친척 등 서로 인연이 얽혀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재물과 사랑, 관심을 행하는데, 이때는 자비의 대상이 넓지 못하다. 더구나 그 안에는 사적인 감정과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순간만 자비를 행하게 되고, 생각났을 때만 자비를 행하게 되고,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만 자비를 행하게 되고, 유정한 것에게만 자비를 행하게 되고, 요구해야만 자비를 행하게 되고, 실체가 있는 것에만 자비를 행하게 되고, 시끌벅적하게 자비를 행하고, 직접 드러내놓고 자비를 행하고, 소극적으로 자비를 행할 뿐이다.
하지만 이승二乘의 보살은 일체의 만물은 모두 허망한 것이며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고 여긴다. 특히 모든 여래의 자비는 일체 중생을 자신들과 똑같이 평등하게 보아, 인연이 있건 없건 모두 제도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불보살은 영원토록 자비를 행하고, 다함이 없는 자비를 행하고, 무정한 것에도 자비를 행하고, 인연이 없어도 자비를 행하고, 요구하지 않아도 자비를 행하고, 실체가 없어도 자비를 행하고, 드러내지 않고 자비를 행하고, 간접적으로 에둘러 자비를 행하고, 적극적으로 자비를 행할 수 있다. ‘무연대자無緣大慈,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이다.
자비는 힘들고 괴로운 인생의 의지처이다. 자비가 있다면 인간에게는 밝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난폭하고 질서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므로 타인과 입장 바꿔 생각하고 내게 이롭거나 해롭거나 모두 평등하다는 관념을 지녀야 한다. 매사에 입장을 바꿔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중생을 내 몸처럼 여겨야만 자비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이에게는 적이 없다)”이라는 옛말이 있다.
불교식으로 이를 해석해 보면 자비로운 사람에게는 적이 없고, 일체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자비라는 뜻이 된다. 한마음으로 자비를 생각하면 탐욕을 없앨 수 있고, 성냄을 없앨 수 있고, 교만을 없앨 수 있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
우리는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 현대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문명보다 더 중요한 현대화의 업적은 사람끼리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람끼리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의사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질까? 항상 보시布施, 애어愛語, 동사同事, 이행利行의 사섭법으로 자비를 수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저마다 자비로운 눈빛으로 일체 중생을 바라보고, 자비로운 말과 자비로운 낯빛, 그리고 자비로운 음성, 자비로운 마음씀씀이로 대중과 인연을 맺으면 우리 사회는 더욱 화목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11. 인과관因果觀 : 연기지도緣起之道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법 앞에 만인이 모두 평등할까? 법률은 맹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는 그 맹점을 이용해 법률의 저촉을 받지 않고 온갖 악행을 자행한다. 때로는 법률도 인정에 좌우될 수도 있으므로, 법률이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다.
유일하게 인과因果만이 공평한 세간의 중재자이다. 인과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인과의 업보는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닌다. 누구라도 “선함이 있으면 선한 과보가, 악함이 있으면 악한 과보가 있다(善有善報 惡有惡報)”는 인과의 정해진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과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어떤 인因을 심는지에 따라 그 과果를 얻는다’란 말이다. 이것은 우주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변화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법칙이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이미 지은 것은 사라지지 않고, 아직 짓지 않은 것은 얻지 못한다”라는 법문은 불교 인과론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법문이다. 어떠한 생각이나 행위도 결국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은 ‘과’를 득하기 전에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어떠한 업의 인연을 짓지 않았다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 또한 얻을 수 없다.
인과는 인간의 실상을 보여준다. 중국의 이십육사(二十六史: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의 통칭)는 가장 방대하고 심도 깊은 인과의 기록이다.
인과는 또한 심오한 철학이다. 인因이 있으면 반드시 그 과果가 생긴다. 그 정확성은 현대의 컴퓨터나 과학 기술도 미치지 못한다. 인과의 과보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늘도 쉽게 바꾸지 못하며, 귀신일지라도 거스를 수 없다. 그것은 우주만물과 인간의 삶 일체를 지배하며,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에 걸친 인연의 씨앗을 심는다.
『열반경』에는 “선악의 과보는 그림자가 몸을 따르는 것과 같고, 삼세인과의 순환은 어긋남이 없다. 이번 생애를 헛되이 보내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부분이 있다.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사를 초월할 수 있다고 해도, 업보와 인과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과는 만법인연萬法因緣으로 일어난 ‘인력因力’에 의해 조종되며, 모든 법을 섭수攝受함으로써 이루어진 ‘인상因相’에 의해 움직이며, 우수하고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이 하늘의 뜻을 바꿀 수는 있으나, 자연의 섭리를 바꿀 수는 없으며 인과 또한 바꿀 수 없다. 인분因分과 과분果分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본성本性의 바다이며, 과거·현재·미래의 제불諸佛이 깨우치신 법계法界인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여 논해서는 안 된다.
불교 인과관의 뿌리는 ‘연기성공緣起性空’이다. 우주의 만물과 모든 일은 이 ‘인’과 ‘연’에 의해서 ‘과’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리고 ‘과’를 낳는다. 이렇게 맞물려 돌고 돌아 결국 삼라만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자연계에서부터 중생계까지, 또 우주 천체에서부터 작은 티끌까지도 인과의 관계를 벗어나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없다.
‘법法은 홀로 일어나지 않고, 경계에 의지해야 비로소 생긴도다. 도道는 헛되이 행하여지지 않고, 인연이 모여 합해지노라’는 말이 있다. 무릇 모든 일은 ‘인’과 ‘연’에 의해 ‘과’가 생기고, 그 인과는 연기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 이치를 분별하고 이해해야 한다.
인과는 불교만이 가진 미묘한 진리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의식주를 영위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체험할 수 있는 진리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것은 ‘인’이고, 배가 부른 것은 ‘과’이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은 ‘인’이 있었기에 배가 부른 ‘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우리는 따뜻한 옷을 입는다. 추운 것은 ‘인’이고, 따뜻한 것은 ‘과’이다. 옷 입는 것조차도 인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식주뿐만 아니라 생사화복生死禍福에도 인과가 있다.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복덕의 인연을 쌓았는가에 따라 현재에 그만큼의 복덕을 받게 된다. 세상에 인이 없는 과는 없으며, 과가 없는 인 또한 없다. 인이 다른 과는 없으며, 과가 다른 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인과가 어떠하다는 것은 오직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과의 이치는 삼제三際, 또는 삼세에 달하고, 시방十方에 펼쳐져 있다. 인과를 믿든 안 믿든 인과는 반드시 존재한다. 공기처럼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공평하게(정식情識이 있는) 인간의 선악에 따른 상벌과 (정식이 없는) 물질세계(기세간)의 성립과 파괴를 주재하고 있다.
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넓은 정원이 딸린 궁궐 같은 집에 살면서 추위와 더위를 모르고 살고, 누구는 비바람이 항상 들이치는 허물어져 가는 집에 태어났다고 가정할 때, 이것은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인연의 과보가 다른 것이다.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왜 누구는 부유하고 누구는 가난한가? 왜 누구는 제왕처럼 산해진미를 먹고, 누구는 끼니조차 이을 수 없을 정도로 굶주리는가? 그들이 지은 인과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운명이나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지은 업대로 과보를 받는 것은 절대 불변의 진리이다.
‘인과’는 ‘인연과보因緣果報’의 줄임말이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며, ‘연’은 간접적인 조연助緣이다. 인연이 합해 생겨나는 사물을 ‘과’라고 칭한다. 세계처럼 크고 넓거나 티끌처럼 작아도 우주 가운데 변하지 않는 존재란 없다고 할 수 있다. 인연이 달라짐에 따라 과보도 다소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불교의 수많은 교리 가운데 ‘인과관’은 인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는 선행을 권하는 설득성의 말이 아니라 우주 인생宇宙人生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인과를 해석한다. 불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인과를 미신처럼 여기게 만드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인과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1) 삼세三世에 걸친 인과
『종경록』에서는 “경전에 이르길 ‘가히 백천 겁이 지나도 한 번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과 연이 만나면 저절로 받게 된다고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인과 업보의 관계가 지극히 복잡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다. 하지만 인과업보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겉모습만 보고 ‘착한 사람은 선종善終하지 못하고 고통 받고, 악한 사람이 더 부유하고 잘 살더라’고 하며 인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인과는 삼세에 걸쳐 있으므로 한순간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과거에 은행에 돈을 많이 저축한 사람이 지금 법을 어겼다고 이전에 저축한 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또 과거에 빚을 많이 진 사람이 지금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하자. 빌렸으면 갚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지금 도덕군자가 되었다고 안 갚아도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이번 생에 괴로움의 업보를 받는 것은 과거 그가 심은 악한 인연이 지금에 와서 무르익은 것이므로, 먼저 괴로움의 업보를 받아야 한다. 지금 생에 무르익은 것이므로, 먼저 괴로움의 업보를 받아야 한다. 지금 생에 선행을 많이 쌓아도 선인善因이 약하면 선연善緣이 성숙되지 못하므로, 다음 생이 돼서야 선한 과보를 받게 된다. 악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고도 선한 보답을 받는 이치 또한 이와 같다.
인과응보는 시간상으로 현보現報, 생보生報, 후보後報 등 삼시보三時報로 분류한다. 식물에도 1년생 식물이 있고, 2년생 식물이 있으며, 다년생 식물이 있다. 봄에 파종해서 가을에 수확하는 것이 있고, 올해 파종해서 내년에 거두어들이는 것도 있다. 인과업보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선악의 인연을 지으면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인연이 무르익었을 때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니,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