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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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교의 청사진(12)
10. 자비관慈悲觀 : 결연지도結緣之道

“불교는 자비로 세상을 품는다(佛敎以慈悲爲懷).”
이 말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구두선口頭禪이다. 하지만 자비의 참뜻이 뭔지를 연구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화의소法華義疏』에서는 자비를 “고통을 뽑아내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불교에는 삼장십이부라는 무량한 법문과 교의敎義가 있지만 모두 자비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자비는 보살이 가르침을 베풀어 중생을 인도하는 근본(『묘법연화경』)이다. 자비를 떠나면 일체의 불법은 마법魔法이 된다. 『종경록宗鏡錄』에서는 “보리심으로 기인하여, 대자비를 근본으로 삼고, 이런 방편으로 거듭 수행하면 무상보리에 이른다”고 하였다.
보살은 중생으로 인해 커다란 자비심을 내고 그 커다란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을 키우며, 보리심으로 인해 불도佛道를 이룩한다. 보살이 중생의 근심과 고통을 보고도 자비심을 내지 않거나, 더 나아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며 고통을 제거하여 즐거움을 주는 보살 수행을 하지 않으면 보리의 큰 도를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비심은 보살의 성불에 필수 조건이다.
자비는 불교신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자비는 일체 중생이 다함께 공유하는 재물이다. 인간에게 자비가 있기에 생명 역시 무한한 의의를 지닌다. 찰나에 불과한 삶 속에 자비가 있으므로 앞날에 무한한 꿈이 있는 것이다. 자비심은 만물이 면면히 이어지게 하는 원천이다. 자비가 곧 불성이다. 중생은 누구나 자비가 있기에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때려도 가만히 있고, 욕해도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정당한 논리와 정의가 무차별적으로 억눌리고 배척당할 때, 군자가 끝없는 비방과 공격을 당할 때, 분연히 앞으로 나서는 것이 용감하고도 적극적인 자비이다. 자비에도 지혜가 있어야 한다. 자비는 한순간의 측은지심이 아니다.
『마하지관』은 자비에 대해 “자비가 곧 지혜이고, 지혜가 곧 자비이다. 무연무념無緣無念이 일체를 두루 덮으니, 임운任運대로 고통을 뽑아내 절로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정당한 논리로 감동을 주고 타인을 돕는 것이 자비다. 자비는 대중에 맞춰 흥겹게 어울려 춤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정념正念을 품고 타인을 돕고 구제하는 것이다. 자비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며, 무언가를 바라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비의 최고 경계는 가족이든 원수든 가리지 않고 평등하며, 사심 없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자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끊임없이 승화하는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의 “자신의 안락을 구하지 않고, 중생이 고통에서 구하기를 서원합니다”라는 구절처럼 ‘천하의 근심을 나의 근심으로 삼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는, 마음이 바로 자비이다.
자비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갖춰야 하는 조건이다. 사람에게 다른 건 없어도 되지만 자비는 없으면 안 된다. 자비가 곧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세간의 사랑은 오염되어 있다. 그래서 제대로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고통이 몰려들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관음현의기觀音玄義記』에서는 “자비가 곧 서원誓願”이라 주장한다. 자비는 사랑을 정화하고 승화시키는 것이며, 사심 없이 충만한 지혜로 남을 돕는 것이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며, 사심없이 충만한 지혜로 남을 돕는 것이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이며, 상대방이 바라는 바를 이루도록 돕는 것이다. 애심愛心, 지혜, 원력, 보시를 응축한 것이 바로 자비이다.
자비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아니라, 몸으로 힘써 수행하는 자신의 도덕 항목이다. 기쁜 얼굴로 칭찬하거나 격려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라고 할 수는 없다. 때론 금강의 힘으로 마귀와 악을 굴복시키는 것이 더욱 실행하기 어려운 대자비이다.
보통 사람도 자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고, 심지어 지금도 자비를 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비의 의미와 차이를 확실히 꿰뚫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 사회 공익에 위반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저질렀다고 하자. 벌을 받아야 하는 그 순간에 어떤 사람이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편을 든다면, 이때 자비는 지나친 관용이고, 자비의 본뜻을 곡해한 것이다.

불교경전에서는 자비의 귀중함을 설명한 많은 비유가 있다.
① 양약良藥 같은 자비 : 몸에 병이 들면 합당한 약물로 병증을 치료해야 하고, 마음이 아프면 자비라는 청량한 법수로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② 선박 같은 자비 : ‘자비’라는 배가 있기에 생사의 망망대해에서 커다란 파도를 뚫고 애욕의 강을 헤매다, 위험을 벗고 즐겁고 평안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③ 광명 같은 자비 : 자비의 광명이 밝게 비추기에 어둠을 깨치고 세간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명확히 볼 수 있다. 자비의 광명이 있기에 인간세계에는 희망이 가득하고, 앞날에는 무한한 꿈이 가득하다. 가난하고 힘든 상황은 자비라는 의지처가 있어 위험을 벗고 편안해질 수 있다.
④ 반려자 같은 자비 : 친구는 항상 우리 곁에서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 존재이다. 자비로운 좋은 친구가 있다면 일 처리에 막힘이 없고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다.
⑤ 마니주 같은 자비 : 오염되고 혼탁한 물속에 밝게 빛나는 마니주摩尼珠를 넣으면 바닥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맑아진다. 복잡하고 혼란스런 인간세계에 자비라는 마니주가 있어 일체의 혼미함을 깨뜨릴 수 있다. 또한 복잡한 것은 단순명료하게 바꾸고 혼란함은 맑고 고요하게 바꿀 수 있다.

자비로운 마음은 만물이 끊임없이 생명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원천이다. 인간세계에 자비가 있기에 우리는 인간세계에 연연한다. 가정에 자비가 없으면 아무리 호화롭고 편안한 곳이라도 얼음 창고라고밖에 형용할 말이 없다. 또한 봉사기관에 자비가 없다면 아무리 융숭한 대우를 해줘도 사람 마음을 붙들기 어렵다. 친척 간에 서로 자비의 마음이 없고 낯선 사람을 대하듯 하면 누구도 자주 왕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어떤 연유로 모든 가정의 거실 한 가운데에 모셔지게 되었을까? 관세음보살이 대자비를 대표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까닭도 관세음보살이 자비를 우리 가정에 가져다주기 바라기 때문이다.
이토록 중요한 자비에 대해 적지 않은 사회 대중이 자비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곡해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자비가 지나친 관용으로 변질되어 사회질서를 파괴할 수도 있다. 제대로 운영하지 않으면 자비론은 죄악의 온상으로 빠지기 싶다.
함부로 방생을 하면 오히려 생명을 해치게 되고, 금전을 함부로 보시하면 탐욕을 더 조장할 수도 있다. 지혜라는 눈이 없이 자비라는 발로만 걸어간다면 자비와 지혜가 함께 하지 않아서, 자비롭지 않아야 할 때 함부로 자비를 행하고, 베풀지 말아야 할 때 오히려 자비를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 없이 자비만 있으면 한쪽 날개로 날아가는 새와 한쪽 바퀴로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이 제대로 날아가거나 굴러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베풀지 말아야 할 때 함부로 자비를 남발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부모가 자식에게 먹고 마시고 마음껏 쓸 수 있도록 돈을 준다면 자비롭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자식을 망치는 것이다. 자식이 잘못했는데 야단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해하고 격려하는 것과 같다. 자식의 옳지 않은 행동을 보았을 때는 자비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잘 알아보지 않고 타인에게 금품을 주어 그 사람이 온갖 악한 짓을 저지르게 하는 것은 행하지 않아야 할 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비로워야 할 때 자비롭지 않음은 무엇인가? 사회의 안녕과 정의를 깨트리는 사람을 보고도 나서서 말하지 않고 오히려 뒤로 숨는 것이다. 학문과 교육을 부흥시켜 젊은 인재들을 길러내고자 열심히 뛰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비방하고 방해하는 것은 자비를 베풀어야 할 때 그렇지 못한 행동이다.
보기에는 자비가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은 커다란 자비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강도 한 사람을 죽여 수천수만의 무고한 백성을 구했다고 하자. 살생은 물론 자비롭지 못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을 구했다면 대자비를 실천한 것이다.
도교 모산파茅山派의 시조인 삼모진군(三矛眞君: 모영矛盈·모고矛固·모충矛衷) 3형제 중 막내 모충 도인이 부인 일가를 돕고자 했다. 이것은 화려함과 사랑을 탐하며 오욕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오욕육진 가운데에서 수행을 한 것이다. 언뜻 보면 그의 행동은 자비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지혜의 방편이 가득한 자비의 수행이다.
인도 파사닉 왕의 왕비 말리부인末利夫人이 자비와 지혜를 내어 주방장의 생명을 구한 일화가 있다. 이것도 계율을 깨트리고 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보기에 자비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대자비의 보살행은 바로 자신의 이익은 생각지 않고 타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자비가 아닌 것도 때로는 자비가 되고, 자비로운 것도 때로는 반대로 자비롭지 못한 행동이 되기도 한다. 방생은 원래 자비로운 행동이지만, 옳지 못한 방생은 오히려 살생이라는 어리석은 행위를 만들기도 한다. 식인어를 방생하면 언뜻 보기에는 자비를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식인어가 물속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심지어 사람까지 해친다면 이것을 자비라고 할 수 있을까?
자비는 머릿속으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몸으로 직접 실천해야 한다. 위산 영우 선사는 임종 시 다음 생에는 물소로 태어나 중생을 위해 일하고 중생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기를 발원했다고 한다.
영우 선사의 “모든 부처의 용상龍象이 되고자 하면 우선 중생의 말과 소가 되어라”는 마음이 곧 자비심이다.
당나라 때 지순 선사는 생명을 구하고자 자신의 신체 일부를 아낌없이 주는 ‘할이구치(割耳救雉: 귀를 잘라 꿩을 구제한다)’를 몸소 행하신 분이다. ‘중생의 괴로움을 끊어낼 뿐, 자신의 안락은 추구하지 않는다’는 덕행이 바로 자비의 구체적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