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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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위한 어려움 타개와 분쟁해결(4)
타이완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

1996년 타이완에서는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각 당의 대선주자들이 선거를 통해 정권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등휘李登輝와 련전蓮戰은 국민당에서 추천받았고, 명성과 인망이 두터웠던 성주석 임양항林洋港·학백촌 참모총장 두 사람도 몰인정한 이등휘의 대항마로서 의분을 품고 경선에 뛰어들고자 했습니다. 당 인사인 팽명민彭明敏 역시 경선에 참가하며 그의 참모인 사장정謝長廷과 함께 승리를 다짐했습니다. 과거 타이완의 4대 공자 중의 하나로 비유된 진사수陳辭修의 아들 진리안陳履安은 경제부장으로 시작해 감찰원장까지 오른 사람인데, 자신의 젊고 뛰어난 재능을 믿고 타이완 정계에 맑은 물이 흐르게 해야 한다며 경선에 참가할 뜻을 비쳤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청렴한 왕청봉王淸峰 변호사를 파트너로 선택했습니다.
타이완의 총통 하나에 이처럼 뛰어난 인사들이 경합을 벌이니 국민당에서 추천한 사람이 결코 우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등휘는 타이완 사람이자 국민당원이며, 1988년 장경국 선생 서거 당시 총통대리를 했습니다. 총통대리의 신분으로 경선에 참여하니 비교적 쉽게 이점을 챙길 수 있었으므로 이등휘의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 보았습니다.
그 밖의 후보자 진영에서는, 진리안의 경우는 불광산의 신도였으니 불광산에서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원했고, 불광산도 정과 의리를 버릴 수 없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 했습니다. 그리고 임양항·학백촌 역시 저와 친한 친구인지라 그들도 제게 협조를 희망했습니다. 저는 물론 두 사람이 따로 나와서 힘을 분산시키는 것보다는 한 팀을 밀어준다면 이등휘와의 경선에서 승산이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 서로 협력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지만, 임양항과 학백촌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나가야 더 승산이 있다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경선에 관해 누구나 선거 전에는 모두 자신이 나가야 승산이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저는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양향과 진리안 사이에서 권유는 해봤지만 두 사람의 공감을 얻어내진 못했습니다.
그 뒤 저를 찾아온 학백촌 장군과 타이베이 도량의 작은 방에서 점심공양을 하며 선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그가 진실로 정과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도 총통과 부총통선거에 뜻이 있는 건 아닌데 당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친구와의 정을 생각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나왔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서 진리안과 임양항이 협력하도록 권유해 달라 했고, 저도 특별히 양명산에 있는 임양항의 공관에서 2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지만, 총통과 부총통을 누가 맡느냐는 문제 때문에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임양항 선생 또한 정직하고 공평무사한 사람이고, 진리안 역시 젊고 전도유망한 인사였지만, 안타깝게도 장경국 선생이 당초 이등휘에게 총통대리를 시켜 이미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에 다른 인사들은 결국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타이완은 결국 이등휘가 총통에 당선되었고, 중국국민당 당주석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등휘의 총통 역임 기간에 공정하고 평등하지 않으며 의롭지 못한 사건들이 많았기에, 나중에 당원이 그의 주석 직위를 파면시켰지만,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타이완에 준 상처는 이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2000년이 되어 정권이 교체되었고, 국민당은 50년간 누렸던 정권을 잃어버리자 수만 명의 군중이 중앙당 위원회 앞에 모여 이등휘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등휘는 내려왔지만 민진당의 진수편陳水扁이 총통에 당선된 뒤 국제무대에서 타이완의 처지는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진실로 때가 되지 않았고, 운이 오질 않았고, 천명이 닿지 않았음이라, 제가 보기엔 미래의 역사가 모두 공평하게 설명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떠한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가운데서 주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친구와의 우의를 생각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이것 역시 인아 관계 유지의 한 방편이며, 관리의 한 격식일 것입니다.

오백웅吳伯雄의 대장다운 풍모
1994년 타이완은 지방자치를 실시하여 타이완성 성장도 국민투표로 선출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국민당에서는 송초유宋楚瑜가 후보자로 나왔고, 내정부장內政部長 오백웅 역시 독자경선 참가를 표출했으며, 야당 후보인 진정남陳定南 씨의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출사표를 던진 세 사람에게 각계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국민당 역시 두 호랑이가 서로 싸워봐야 득 될 것이 없음을 알고, 당내 인사가 나서 기왕에 당에서 송초유를 당 후보로 정했으니 오백웅에게 감정적으로 나서지 말고 당을 위해 조금만 희생해 달라 권유를 했습니다. 그러나 오백웅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타이완에 겨우 아리산만 남는다고 해도 자신은 끝까지 성장 경선에 참가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양측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당시 성의 당위원회 주임위원이었던 종영길鍾榮吉선생이 저를 성의 당위원회로 초청해 직원들에게 강연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그도 역시 제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번 선거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이때 문득 제게 ‘둘째 철학(老二皆學: 무리하게 첫째가 되기보다 온당한 둘째가 되는 것)’이 떠올랐으니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백웅을 만났을 때 일시적으로 떠오른 영감에 빗대어 경선 포기를 권했고, ‘둘째 철학’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며 선거의 득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제 말을 듣고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중에 대외적으로 제 영향을 받았다 표명하기도 했습니다만, 그의 부친인 오홍린吳鴻麟 선생이 그에게 양보하라 한 것이 가장 큰 힘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국민당은 두 사람이 경쟁하는 일 없이 송초유 선생이 순조롭게 진정남 선생을 이겼습니다. 이 역시 큰일은 작게 만들고, 작은 일은 없던 것으로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한 차례의 정치 폭풍은 이렇게 간단하고도 쉽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여론에서는 계속해서 오백웅을 제가 후보 사퇴하게 했다 하는데 이 말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에게 후보 사퇴를 시키면 제가 무엇으로 그의 손실을 보상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공로는 감히 제가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분쟁이 없고 단결하여 협력만 한다면 국민당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모두들 명리名利 앞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권력을 위해 끊임없이 서로 물어뜯기 때문에 많은 역량을 약화시켰으니, 타이완에서 국민당의 상황이 날로 악화되는 것도 원인이 없다고는 못 할 것입니다.
2007년 원래 국민당 당주석은 특별비 문제로 기소되어 당주석 자리를 사퇴했기에 국민당에는 지도자가 없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때 정치를 이미 담담하게 바라보던 오백웅 선생에게 당을 위해 그래도 경선에 참가하라 격려했습니다. 후보가 등록은 오후 4시까지였습니다. 그는 타이베이 도량에서 불광회 업무를 다 처리하고, 오후 3시에 달려가 1분 남겨놓고 간신히 등록을 마쳤습니다. 결국에는 국민당 당주석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백웅 선생이 당주석에 재임하는 기간 국민당에서 선출된 입법위원이 입법원 정족수 3분의 2이상을 차지했으니, 그것은 입법원의 과반수나 됩니다. 그 뒤 그는 또 마영구馬英九 선생의 선거를 도와 높은 득표로 총통에 순조롭게 당선시켰으니, 이는 당주석으로서 무척 성공적이고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무슨 원인에서인지 마영구 선생은 총통에 당선된 뒤 당정黨政이 합일해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 듯, 오백웅 선생에게 당주석 자리를 자신에게 양보하라 했습니다. 이에 오백웅 선생도 넘겨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때부터 국민당은 더욱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오백웅 선생께 국제불광회 중화총회의 총회장을 맡겨 그가 사회대중 속에서 수많은 활동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또한 당초 그에게 성장 선거에서 사퇴를 권유했던 저의 보상이 아닐까 합니다. 그도 항상 대중에게 자신의 집 4대가 저와 우의를 나누고 있으며, 모두 불교를 수호하는 수호자라 말합니다. 이 또한 제가 타이완에서 얻은 가장 훌륭한 선연입니다.
제가 오백웅 선생에게 성주석의 경쟁에서 물러나라 권했을 때, 그는 “고개를 돌리니 피안의 세계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태도와 아량이 대중의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이 어려울 때는 자신을 내려놓고 당주석 경선에 참가하며, 의로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하는 그의 기량 역시 대중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고, 나서야 할 때 나서라는 소소한 건의와 작은 인연을 그에게 주었지만, 그는 기꺼이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저와 오백웅 선생이 우의를 나누며 쌓은 서로에 대한 신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관리학’은 상대의 손해를 줄이고, 손실을 입게 되었으면 그에게 적정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관리학’의 중요한 이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