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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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위한 어려움 타개와 분쟁해결(1)
관리학은 당신에게 타인을 관리하라 시키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관리의 관건은 사람들에게 인연을 주는 것입니다. 관리학을 잘 배우려면 먼저 상대방에게 기쁨과 이로움을 주어 그가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적어도 서로가 이익을 얻습니다.

들어가는 말

중일전쟁에서 승리하던 그 해, 국민당 성당부省黨部의 책임자가 우리에게 ‘공민公民’ 수업을 강의해 주려 초산焦山에 왔습니다. 우리의 상을 넓혀주고 더 멀리 보게끔 해주는 등 강의가 너무 좋아 이 선생님을 존경해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함자는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18세가 되던 그해, 하루는 그가 우리 전부를 불러 국민당 당원에 참가하라고 했습니다. 존경해마지 않던 선생님이란 이유만으로 무슨 당이든 상관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국민당원이 되었습니다. 제가 올해 90세가
되었으니, 계산해 보면 저는 이미 72년의 국민당 당적을 가진 국민당 당원이었던 셈입니다. 현재 타이완에 72년의 당적을 지닌 국민당 당원은 분명 몇 안 될 것입니다.
저 자신은 국민당의 활동에 참가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이제껏 한 번도 참가해 본 적이 없습니다. 딱 한 번 장경국(莊經國: 장개석 총통의 장남) 선생이 양명산陽明山에서 국민당 12기 삼중전회(三中全會: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개최하면서 저를 국민당 평의위원評議委員에 임명했습니다. 그것은 국민당 내에서도 아주 높은 자리로, 장부인(蔣夫人: 장개석 총통 부인인 송미령 여사)과 장위국(蔣緯國: 장개석 총통의 차남) 장군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것입니다. 국민당의 원로였던 이자관李子寬 선생이 제게 “국민당에 가입하면 스님들이 포교하는 데 편리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생각나, 불법의 포교를 위해 무슨 당에 가입하느니 안 하느니 따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당시 저는 타이완 도처에서 포교 강연을 하고 있었는데, 치안부서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국민당이라는 배경만 있어도 도움을 많이 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삼중전회에 참가했습니다. 장경국 선생은 회의에서 학백촌.柏村 선생과 마수례馬樹禮 선생이 군대와 당을 대표해 각기 발언하니, 저에게도 대회에서 의견을 약간이나마 피력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날 오후 학백촌 장군이 “오늘의 대회는 우리 세 명의 양저우 사람이 발표하네요”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마수례 선생과 학백촌 선생, 그리고 저 세 사람은 모두 양저우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국민당은 개방을 시행해야 하며, 특히 중국 본토의 친지 방문과 양안의 왕래를 개방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4,50년 동안 국민들은 양안의 대치 상태로 집이 있어도 돌아가기 어렵고 가족이 있어도 만나기 어려웠으니, 살아가면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민주당파 인사를 포용하여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그들 중에도 우수한 인재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옥수高玉樹·구연휘邱連輝 등과 같은 이는 국민당에서는 중용해서 써야 할 타이완의 인재입니다. 모두가 국가를 위해 인아를 가르고 분별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들리는 말로는 중앙당위원회에서는 제 건의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훗날 장경국 선생의 개발정책과 타이완의 계엄 해제가 저의 건의와도 관계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도 합니다. 장경국 선생은 아랫사람의 의견을 잘 듣지 않는 성격이고, 저는 그의 부하가 아닌 스님인데, 일개 스님까지도 개방해야 하고 민주화해야 한다 말하는구나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수많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저를 일러 ‘정치화상’이라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정치 쪽에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치를 할 줄도 모르고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불광산에 가끔 정치인들이 방문하면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를 대접하고, 오실 때 환영하고 가시면 배웅해 드리는 게 전부입니다.
그 밖에 총통부에서 강연한 것, 장경국 선생의 초대를 받았던 것 외에 저는 성정부는커녕 현정부顯政府조차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타이완에서의 모든 건설과 홍법 과정에서 곤란한 일이 더러 생기더라도 저는 법대로 해결했지 봉투를 내밀어 문제를 해결한 적이 없으며, 공무원에게 굽실대며 부탁한 적은 더군다나 없습니다. 그러나 불법으로 맺은 인연 덕분에 늘 좋은
마음을 가진 여러 인사들이 도움을 주셨는데, 이것 때문에 모두들 저를 정치화상이라고 한다면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수많은 구제 사업을 했으니 또한 자비화상일 것입니다. 또한 많은 교육 사업을 했으니 교육화상이기도 할 것입니다. 문화 출판 사업도 했으니 저를 문화화상이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부르지 않고 ‘정치화상’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정치 활동에 참가해 본 적도 없고, 심지어 불광산을 건설하며 정부에 벽돌 하나, 기와하나 보조해 달라 요구한 적 없었으며, 지금까지 단 한 푼의 보조도 신청한 적이 없는데 ‘정치’라는 단어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유명 영화감독인 유유빈劉維斌 선생께서 “사람들이 스님을 정치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스님에게 그만큼 힘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제게 무슨 정치적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뒤에 생각해 보니 명성과 지위는 한낮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수십 년 동안 정계의 수많은 주요 인사들, 특히 그들 사이의 분쟁이 있으면 저도 그들에게 분쟁을 해결하고 근심을 덜도록 도움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은 저의 공헌도 있다 생각하여 그것을 간략히 적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