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영불迎佛 화차花車 저는 이란에서 부처님오신날 가두행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오슝에 온 뒤에도 가오슝시 불교회는 부처님오신날 경축행사를 제게 맡겼습니다. 과거 경찰과 교섭한 경험으로 저는 ‘가두행진’이란 뜻의 ‘유행遊行’이란 글자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오신날 기념 영불 화차’라는 타이틀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각 사찰에서 화차를 준비해 가오슝시의 크고 작은 골목을 돌면서 부처님 탄신의 성대한 분위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곤란하다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모두들 수레를 꽃으로 장식하는 데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 경제적으로 곤란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차 시합을 열어 가장 멋진 화차를 선정해 표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가오슝에는 대략 30여 개 정도의 사찰이 있었는데, 저는 일일이 사찰을 방문해 만드는 법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글자는 어떤 형식으로 쓰는지, 가로로 쓸 때와 세로로 쓸 때는 어떻게 부르는지, 어떻게 화차를 장식하는지 등을 그들에게 모두 알려주었습니다.
여전히 난색을 표하며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만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찰에서는 가오슝시민 앞에서 자신들의 사찰을 뽐내고 홍보할 텐데, 만들지 않으면 여러분의 사찰은 점차 잊힐 것이고 점점 낙후될 것입니다. 참여해야 더욱 발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물론 저도 결과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고 제 방식대로 모두의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수산시壽山寺 한 곳에서만도 민국 53년(1964)의 부처님오신날에만 10여 대의 화차를 만들었는데, 신도들이 분담하고 협력하여 화차를 제작했습니다. 나중엔 다른 사찰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앞 다투어 참여했으며, 총 2~3백 대의 화차가 만들어져 가오슝에서 위풍당당하게 행진을 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오복五福 네거리에서 수산사 앞쪽 큰길 처음부터 끝까지 고층건물에서 아래까지 늘어뜨린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하늘이 진동할 정도였고, 연기로 가득 차 걸어 다니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두행진이 아니라 부처님을 영접하는 것이었기에 경찰도 우리를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중생이 함께 행사를 치르려면, 첫째는 그들에게 희망과 영예와 성취감을 주어야 하고, 둘째는 사전에도 상점과 가게를 돌며 그들에게 “여러분을 축복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며 선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의 영불 활동은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환영받았습니다. 만일 계속 이어져 갔다면 타이완 불교는 분명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중국불교회가 예산 낭비라 생각하고 이 활동을 가로막았습니다. 낭비하지 않고 돈을 쓰지 않으면 그 돈을 도대체 어디다 쓸 겁니까? 왜 부처님 탄신을 위해, 포교를 위해 돈을 좀 들여 공헌하려 하지 않는 겁니까? 만일 불교회에서 나서서 주도했다면 명분이 더 섰을 테니 더 많은 효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저는 불교회의 지지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적으로 성심성의껏 이란에서 시작해 가오슝까지 성대한 영불 행렬을 여러 차례 치렀습니다. 해외 화승(華僧: 중국 스님) 환영 행렬도 제가 주최해 가오슝 기차역에서부터 봉산鳳山 주위를 돌아 다시 가오슝 기차역까지 오는 데도 대성황을 이루며 인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불교회는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도에게 돈도 걷지 말고 사찰의 경비도 들이지 말라고 제게 권했습니다. 그 말은 곧 부질없는 짓 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저는 그저 한탄만 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방식과 기획과 선도 역할이 관리학 측면에서 장차 큰일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불교회가 저를 지지해 주지 않으니 개탄을 금할 길 없다 하겠습니다.
하나의 도로로 맺어진 인연 50여 년 전 제가 불광산에서 개산하고 사찰을 짓는데, 벽돌공장에서 불광산까지 약 20여 킬로미터의 도로가 모두 진흙으로 된 좁은 길이었습니다. 비라도 오면 이 진흙길은 걸을 수조차 없었지만, 저는 이 길을 정비할 힘이 없었습니다. 개산 후 얼마 뒤, 도로국(공로국公路局) 제3처장인 예사증倪思曾 선생이 현장답사를 나왔습니다. 그는 남부의 모든 도로를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참관하고 난 그를 붙들어 엉성하게 지어놓은 불광산 회은당懷恩堂에서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청했고, 그도 기꺼이 제 뜻에 응해 주었습니다. 식사 후 그는 매우 흡족해하며 말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 사찰을 건축하면 많은 이들이 예불을 드리러 올 수 있고, 사회 분위기 개선과 인심 정화에 커다란 도움이 되겠습니다.”
“처장님, 벽돌공장에서 산 위까지의 길이 진흙도로입니다. 평소에도 걷기 힘든데 비라도 오면 차량이 지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지금은 교통이 너무 불편해 신심을 정화하러 올 사람도 드뭅니다.”
“이 도로는 현에 있긴 하지만 우리 제3공무국工務局에서 대신 관리하고 있습니다. 스님 말씀을 참고해 아스팔트로 다시 보수하는 문제를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건 정말 처장님의 가장 큰 공덕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아스팔트길이 조성되어 불광산 개산에 필요한 각종 자재들도 쉽게 운송하고 사람들이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한번은 태풍이 심하게 불어 비바람이 몰아치고 산에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산 전체의 물이 도로로 쏟아져 이렇게 만든 도로를 흔적도 없이 휩쓸어버려 사람의 통행이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이 도로 상황을 사진으로 찍고, 도로에 배수구가 없으니 산에서 홍수가 내려오면 배출할 수가 없어 도로가 파괴된 것이라며 파괴된 원인을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의견을 전달했고, 예사증 처장도 이것을 보고는 그도 전문가인지라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관련부서에 경비와 계획을 조속히 마련해 배수구까지 제대로 된 더 넓은 도로를 만들도록 힘써 주었습니다. 그래서 더 편리하고도 안전하게 지나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산한 지 7~8년 정도 흐른 후 이 정도는 차츰 차량도 많아지고 사람도 많아졌지만, 사용하기에는 폭이 좁았습니다. 게다가 이 도로의 아스팔트길은 2급에 속하는 것으로, 1급인 고속도로처럼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성정부의 성주석(省主席: 도지사에 해당)인 구창환 선생의 모친이 왕생하셨을 때, 저는 그를 위해 장엄한 왕생불사를 해드렸습니다. 그도 제가 돈 한 푼 받지 않고 해준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현장縣長과 시장市長을 모시고 불광산에서 회의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성껏 대접하며 이 기회를 빌어 다른 현과 시의 도로는 모두 곧고 평평한 반면, 가오숭현의 도로만 구불구불하고 차량통행도 불편하다며, 그에게 가오슝현의 모든 도로가 타이완의 다른 현과 시에 못 미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듣고 나서 깊이 고민하던 그는 지방 건설에 힘쓰겠다고 했으니, 이는 저에게 성의를 표시한 셈이었습니다. 그 후 이 도로는 또다시 넓어지고 1급 노면으로 새로 보수되었으며, 구불구불한 구간을 직선으로 개선했으니, 이는 구창환 선생의 공덕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관리하면서 타인이 우리들에게 시주할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먼저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길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입니까? 바로 인연을 맺어 생겨난 것입니다. 저는 연이 닿는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있고, 그에게 편리함을 줄 수 있고, 그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믿음을 주고, 타인에게 기쁨을 주고, 타인에게 희망을 주고, 타인에게 편리함을 준다’는 불광산의 네 가지 관리신조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관리학 측면에서 보면 타인을 이해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상대가 이해를 해야 당신에게 한 손이라도 거들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힘은 없지만, 제게는 입이 있습니다. 그 입으로 저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 상황이 이해가도록 설명할 수 있고, 입장을 바꿔 국민을 위해 봉사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 일 처리가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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