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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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 찬 사람에게 더욱 필요한 불법 ⑥
교도소

올해(2016)는 불광산 개산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침설봉 장군도 불광산을 찾아 ‘불광산 담론’에서 뤼다오 관세음보살상의 인연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와 당시 뤼다오 상황을 이야기하며, ‘손립인孫立人 사건’의 곽정량郭廷亮 소장과 이오李敖 백양 여등발余登發 진국陳菊 시명덕施明德 등의 인사처럼 수감된 수많은 사람 모두 국가사회의 걸출한 인재들인데 권력의 억압 아래 불공평한 재우를 받다니 참으로 가엾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세월을 뤼다오에서 보냈으니 개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우리가 그 결말을 판단할 방법은 없으니 그저 인과에 맡길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다
민국 45, 46년(1956, 1957) 즈음, 국민당 정부는 가오슝 시민의 요구에 따라 가오슝 요새사령부가 점유한 수산壽山 가운데 20헥타르를 떼어내 수산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의 활동공간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공원 안에 ‘충렬사忠烈祠’라는 사당이 하나 있었으며, 가오슝 시의회는 수산공원을 건설하는 비용으로 70만 원의 예산을 책정했습니다. 당시 70만 원이면 대략 천 냥(兩: 1냥이 50g)의 황금과 맞먹습니다.
진무장陳武璋 시장이 우리 여러 신도들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제게 수산공원과 충렬사의 관리를 모두 맡아 달라고 요구하면서 충렬사를 불교도량으로 바꿔도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진무장 시장에게 충렬사의 ‘사祠’를 ‘사寺’로 고쳐 충렬사忠烈寺로 해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글자 한 자 차이지만, 그렇게 하면 의회에서 70만 원의 예산이 통과되기가 어려울 것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제게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누군가 제게 어디에 머무느냐 물었을 때 제가 가오슝 충렬사당에 머문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충렬사忠烈寺로 바꾼다면 저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 한 글자 차이 때문에 가오슝의 신도 모두가 수산공원의 관리를 맡아 달라고 재삼 제게 부탁한다고 해도 저는 싫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출가한 스님으로서 제가 어찌 충렬사당 안에 머물면서 절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충렬사의 관리를 맡지 않겠다고 하자, 진 시장은 다시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수산 아래에 일제 강점기 유산인 서본원사西本願寺가 있습니다. 스님께 맡길 테니 관리해 주십시오. 대략 2천여 평 정도 토지에 꽤 값나가는 땅입니다.”
“서본원사는 일제 유산이고, 지금은 부녀습예소婦女習藝所가 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녀습예소를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부녀예습소의 소장인 유보화劉保華 씨는 깐깐한 여성으로 아무리 이야기해도 옮기기를 거부했습니다.
진무장 시장의 임기 만료 후 진계천陳啓川 시장이 이어받았습니다. 우리는 진계천 시장과도 인연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과거시에서는 서본원사의 터, 그러니까 지금의 부녀습예소 자리를 우리가 도량으로 다시 회복시키게 해준다고 약속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진계천 시장도 그 자리에서 약속했지만, 정부의 예산 교부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올해와 내년에는 모든 예산이 체육관 건설에 들어가는지라, 정말 부녀교습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 재건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4년을 또 기다렸습니다. 민사당民社黨의 양금호楊金虎가 시장에 당선되었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고, 이 안건은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수산사는 바로 부녀습예소의 입구에 있었고, 당초 수산사가 점유한 땅은 겨우 백여 평 정도로 아주 적었지만, 제가 수산사를 받아들인 이유는 장차 부녀습예소(서본원사)와 연결해서 홍법에 더 커다란 쓰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금호 선생이 시장이 된 후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이 안건은 흐지부지되어 버렸습니다. 더구나 우리도 깐깐한 유보화 소장을 상대로 적대적 관계가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툼이 없이 지내는 것이 좋은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소장은 평소 우리와 왕래도 하고 우호적이었습니다. 때로는 그도 우리를 찾아와 부녀습예소에서 사회문제로 인해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부녀들을 위해 수업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안의 수많은 여성 대부분이 과거 이른바 ‘불량소녀’들이었습니다. 사회에서 마약을 하거나 술집 카바레 등에서의 생활이 몸에 밴 사람들이며, 현재 마지못해 부녀습예소에 있는 것뿐인데 그들에게 불교신앙을 가지라니요. 그들은 부처님이 어디 사는 누구의 이름인지, 무엇을 설파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