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민주화의 열풍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1980년 중반에 대학생활을 했다. 과거의 케케묵은 역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진정한 역사학을 배우겠다는 풋내기의 어설픈 작심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 최루가스의 연기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마침 절친한 선배의 권유로 답사여행을 함께 다니게 되었다. 당시 사학과의 수업과정에 정기적인 답사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우리 문화의 참모습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말에는 서울과 경기 일원의 역사 현장을 찾고, 방학이면 배낭을 짊어지고 열흘이 넘도록 사적지를 탐방하였다.
점차 횟수를 거듭할수록 우리의 답사는 질을 높여나갔다. 주마간산의 관광이 아니라 사전에 여행계획을 세우고, 자료를 수집하여 자료집을 만들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답사는 계속되었고, 이렇게 해서 전국의 역사유적지를 대부분 섭렵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원이 늘어났고, 보다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탑상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거칠고 세련되지 못했지만 ‘탑상’이라는 학술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우리 문화의 중심은 불교이고, 그 불교문화의 중심은 탑과 불상이라는 의미였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물론 어려서 작은 누이를 따라 다니던 마포 석불사에서의 부처님과의 만남이 첫 인연이었지만, 불교학 정확하게 말하면 불교사를 공부하게 된 시작은 이 때부터이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불교사 공부를 시작했다. 어쭙잖게도 당시 불교미술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안다고 자부했던 터라 불상과 탑 등의 양식보다는 그 내면에 깃들어 있는 의미와 역사성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좌절의 연속이었다. 당시 사학과에는 불교사를 전공한 학자가 없었다.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모든 걸 혼자 시작해야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제대로 된 불교사 개설서 하나 없던 시절, 내가 택한 스승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였다. 주지하듯이 〈조선불교통사〉는 우리 불교사 자료의 집대성이다. 짧은 한문 실력으로 읽고 또 읽었지만, 무지와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학기가 끝나갈 무렵 마침내 스승을 만났다. 평생을 불교문화와 불교의식 연구에 전념하던 홍윤식교수님이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불교사의 올바른 연구방법을 하나, 둘 배우기 시작했고, 석사논문으로서 신라 미륵신앙에 관한 연구를 제출하였다.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몇몇 선배들과 함께 사찰문화연구원 설립에 참여하였다. 전통사찰의 참모습과 우리 문화의 원형을 모색하고 이를 대중화하자는 취지에서 〈전통사찰총서〉를 발간하였다. 전각과 상설은 물론, 비문과 현판 등을 낱낱이 조사, 기록하여 지금까지 18권에 이르는 방대한 총서가 발간되었다.
이 시절은 나에게 불교사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주었다. 조사과정에서 대소를 막론하고 많은 사찰에서 이른바 ‘사찰계’에 관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선사회에 유행했던 친목계가 절에서도 있었구나 라는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경주 기림사의 사찰계에 관한 비문을 다수 발견하면서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즉 사찰계는 조선시대 억불이 만연한 사회에서 불교가 유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의 현대불교가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문화와 의식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불교는 현대불교의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조선불교를 억불이라는 이름으로 침체하였다거나 쇠퇴하였다는 평가는 현대불교의 모습을 스스로 폄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히려 악조건 하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기층문화의 토양을 이루었다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불교사를 공부하겠다고 뛰어든 지 십여 년을 훌쩍 넘겨서야 비로소 내 공부의 의미를 찾았다. 워낙 천성이 부지런하거나 영민하지 못한 탓이지만, 늦게나마 발견한 이 소중한 인연을 평생 간직하려 한다. 역사학의 본령이 과거의 사실을 통해 오늘을 조망하는 것이라면, 불교사를 공부하는 나의 본령은 바로 조선불교의 참모습을 탐구하여 우리 불교의 오늘을 보는 일이다.
한 상 길/동국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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