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일 서울대 교수
“아버지, 출가(出家)를 하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구하고 싶습니다.” “아들아, 세상을 올바로 제도하려면 세속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세속의 학문은 때가 있는 법이니, 우선 대학까지 공부를 마쳐라. 그때도 네가 출가를 원한다면 그때 허락하마.”
열여섯살 앳된 소년 박세일은 서울고 1학년 시절부터 출가를 꿈꿨다. 충동적인 도피는 아니었다. 1960년대 초 중2때부터 서울 청계산 청계사에서 금오스님과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자비’의 참뜻을 깨우치고 〈능엄경〉을 줄줄 외었던 그다. 중학교 룸비니 학생회에 소속돼 종로 대각사에서 매주 정기법회를 봉행하면서, 스님들의 설법에 귀기울였다. 출가의 의지를 일단 접은 이듬해, 청담스님은 불심 돈독한 이 청년에게 ‘영성(領星)’이란 법명을 내려줬다. ‘요긴한 별’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지금, 그는 국회를 통과한 행정도시법에 반대해 ‘정책 소신’을 지키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내던졌다. 한국 의정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한달여간 ‘만행’을 마친 박세일(57, 전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를 최근 서울 반포동에 있는 그의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이제 정치인이 왜 정치를 하는지 자기를 성찰할 때가 왔습니다. 통합이 아닌 분열의 정치, 합리가 아닌 감성의 정치를 하고, 과거청산적, 인기영합형 정치를 하는 것에 깊이 참회할 시점이지요.”
정치의 핵심은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타협’에만 급급한 최근 정치현실에 서 그는 보배와 같은 존재다.
1966년 서울대 법대 입학 후 그가 추구한 이상은 학문에 앞선 불교수행의 실천이었다. 그는 서울법대내 불교모임인 법불회(法佛會)에 몸담고, 실질적인 수행동아리인 ‘대학생 구도회(求道會)’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 수행자와 똑같은 생활수행을 추구하는 구도회는 날마다 봉은사 명성암에서 조석예불은 물론 참선과 발우공양까지 실천하는 수행공동체다.
‘대학생 구도회’서 주도적 활동
구도회 지도법사인 법정스님과 함께 불교를 공부했고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광덕스님의 ‘보현행원’의 가르침을 받았다. “광덕스님은 우리들에게 자성불(自性佛)을 믿고 불안(佛眼)으로 세상을 보고 불심(佛心)으로 세상을 읽고, 매일매일 불행(佛行)을 실천하라고 강조하셨죠.” 방학이면 걸망을 짊어지고 지방으로 내려가 성철스님의 지도로 치열한 구도정진에 들어갔다. “1967년경 김룡사에서 성철스님과 〈육조단경〉을 공부하고 날마다 3000배 기도를 올렸습니다. 보통 오전 11시 법당에 들어가 1000배는 힘으로 해냅니다. 1000배가 지나면 무아지경에 빠져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빠져나가죠. 그럴 즈음 성철스님은 죽비에 뒷짐을 지고 법당에 들어오세요. ‘이놈들아, 절한다고 부처 되냐’ 하시면, 그때부터는 분심(忿心)이 일어나 악착같이 3000배를 회향합니다.” 마치 어제 일을 이야기하듯, 박 교수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대학시절 아버지를 잃었다. 봉은사에서 천도재를 올리고, 며칠 뒤 법정스님이 그를 불렀다. “스님은 아버지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감지하지도 못했던 어린 저를 당신 무릎 앞에 가까이 앉혀 놓으시더니, 간곡한 설법을 해주시면서 아버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해주셨어요. 아주 낮은 음성으로 제 어깨를 어루만져주실 때, 비로소 아버지가 내 곁을 떠나셨음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법정스님과의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1995년 YS시절 그가 대통령 비서실 정책수석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고, 1996년 청와대 내 불교모임인 ‘청와대불자회’를 창립했을 때 초대법사로 초청됐다. 그 자리서 법정스님은 깨끗하고 올바른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일침을 강하게 내려주셨다고 그는 회고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그가 정치인이 되기까지는 대학생활 중 캠퍼스와 봉은사를 오가며 깨우쳤던 당시 현실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봉은사에서 새벽예불과 아침공양을 마치고, 50여분을 걸어 한강 나루터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뚝섬에 와서 종로 5가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환승하여 대학로(당시 서울대)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 도중, 그가 만난 이들은 가난과 피곤에 찌든 여공(女工)들이었다. “당시는 노동집약적인 수출산업 중심의 산업화의 시기였습니다. 지방에서 상경한 수많은 여공들이 가발과 봉제, 전자 분야에서 일할 무렵이었지요. 대학노트를 끼고 다니면서 봉은사 부처님전에서 제아무리 ‘안락법문’을 듣고 ‘청정법계’를 담았다 해도 만원버스에 허덕이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1970년부터 3년간 한국산업은행에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직장을 나온 뒤에는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부에서 ‘노동경제와 사회정책’을 연구했다. 이어 1975년부터 5년간 미국 코넬대학에서 ‘노동경제’ ‘경제발전론’ ‘법경제학’ 등을 공부하고 경제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하자마자 1980년부터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연구원으로 활동했고 1985년부터 10여년간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15년에 걸친 긴 연구활동에 힘입어 1995년 마침내 청와대에 발을 들였다.
사회모순 해소위해 정치입문
“사회정의, 소득분배, 환경생태 등이 당시 저의 화두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부주도의 물적 경제성장 위주 정책에서 벗어나, 보다 복합적 균형적 발전을 위한 정치경제 사회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법과 교육 노동계에 대한 철두철미한 개혁 프로그램은 당시 여당에서조차 청와대 사회복지수석이었던 그에게 ‘사회혼란수석’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98년 IMF가 터졌다. “정치인으로서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좌절감도 컸습니다. 공든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심정에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청와대를 나와 〈율곡전서〉와 〈목민심서〉를 들고 전국 사찰을 떠돌아다녔다. 율곡이 비장한 각오로 ‘나의 개혁안으로 3년 내에 나라가 바로서지 않는다면 즉시 내 목을 치라’고 했던 구절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요즘도 박 교수는 틈나는대로 가방 가득 서적들을 싸들고, 산따라 길따라 사찰을 찾아다닌다. “속세에 있을 때 동기동창으로 지냈던 지환스님(조계종 기본선원장)을 얼마 전 뵈었어요. 스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자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지혜와 자비로 세상인연을 비추며 살라. 그리고 스승과 부처님, 중생과 부모에 대한 사은(四恩)을 갚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보라’고요. 글쎄 그 보은(報恩)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요즘 제 화두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로 국민분열”탄식
박 교수는 이 시대가 가장 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개혁은 ‘공동체적 자유주의’ 개혁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개인의 존엄성, 창의성 그리고 자유를 극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린시절부터 불교교리를 공부하고, 불교적 세계관을 키워온 그는 이같은 자유주의 개혁을 전제로 깨우쳐야 할 사실이 바로 ‘모든 만물은 연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개인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개인의 존엄과 창의의 중요성을 인정한 뒤에는 당연히 공동체적 가치와 유대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뒤따라야 합니다.”
공동체적인 가치와 연대의 중요성을 살리는 자유주의가 우리가 지향해야할 공동체 자유주의며 ‘연기적 자유주의’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21세기는 중도국민통합론이 개혁론의 기본방향이 돼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 강북과 강남, 친미와 반미 등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국민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장점을 통합해야 합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함께 아울러야 합니다. 사고의 양극화는 후진문화의 산물이니까요.”
그는 공동체 자유주의자, 연기적 자유주의자는 바로 부처님이라고 강조했다.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양변을 벗어나 모두를 아우르는 원융무애사상이 필요할 때”라고 거듭 강조한 그는 “개개인이 모두 대자유의 불성을 가진 완성자이고 세상은 연기적 관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미 오래전에 가르쳐 주셨다”고 말했다.
박세일은 누구 /
1948년 서울 생. 박세일 교수는 서울대 법대, 일본 동경(東京)대학 대학원 경제학부와 미국 코넬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으며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불자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다. 주요 저서로는 〈법경제학〉 〈아담스미스연구〉 〈소비자주권의 교육대개혁론〉 등이 있다. 특히 1999년 펴낸 ‘대통령의 성공조건’은 노무현 정권 초기 ‘교과서’로 통했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아 비례대표로 국회 입성,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과 정책위의장을 지내다 수도이전 문제로 의원직을 포기했다.
[출처 : 불교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