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득 성동구청장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오리 100마리를 샀다. 쭈삣 쳐다보는 눈빛이 안쓰러워, 거위도 두 마리 겸했다. 구청장은 그들을 데리고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내(川)로 향했다. 죽은 듯 살아가는 냇물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어서다. 물 만난 오리는 파닥거리며 종종걸음이다. ‘럭셔리’한 거위도 생긋생긋 좋아 웃음을 참지 못하는 태세다. 그 다음날, 오리와 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잡아먹혔는지 팔려갔는지, 실망감에 사로잡힌 구청장이 이번엔 오리 300마리를 풀어놨다. 결과는 마찬가지. “각박한 서울서 생명과 어우러져 살기 참 어렵더군요. 누구라도 그 오리새끼들을 자식과 같은 생명체로 여겼다면, 그네들이 하룻밤에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텐데….” 올해로 10년째 성동구의 살림을 꾸리고 있는 고재득(59) 성동구청장. 지역행정의 핵심은 ‘생명사랑’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고 구청장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 금산사 사하촌에서 피란생활…힘들었지만 신심 얻어
불교의 생명사랑 실천하고 싶어 중랑천에 오리 방생 오늘도 계속…
그의 생명사랑은 한국전쟁 중, 전북 김제 모악산 아랫마을서 피란생활을 했던 원평초등학교 시절로 올라간다. 고향인 전남 영암에서 살다 전쟁을 피해 외가인 금산사 사하촌으로 옮겨왔다. “열한번이나 금산사로 소풍을 갔지요. 봄이면 흐드러진 벚꽃터널 아래로 친구들과 손잡고 금산사를 찾았습니다. 단풍 짙게 물든 모악산의 가을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요즘도 금산사를 찾으면, 그 옛날 동심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고 구청장은 금산사를 오르내리면서, 무심한 풀 한포기도 밟지 않고, 집 잃은 개구리까지 도랑을 찾아줄 만큼, ‘생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었다고 했다.
사하촌에 살면서 사찰이 곧 공원이자 놀이터였던 외손자에게, 외조부는 불교교리보다 생명사랑의 가르침을 심어준 것이다. 당시 외조부는 금산사 바로 앞 한약방 주인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엔 으레 약방서 시간을 보냈던 그는, 그 시절 금산사 주지였던 월주스님이 출타 때마다 약방에 들러 할아버지와 인사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구청장 시절 월주스님(총무원장 재임 시)을 한번 뵌 적이 있었는데, 그 약방집 외손자라고 하자 스님이 깜짝 놀랍디다. 무수한 세월 속에도 긴요한 인연은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중학생이 된 그는 광주로 건너왔다. 여타 우등생처럼 공부에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성적은 최고를 달렸다. 당시 광주에서 명문대로 가기 위한 기본코스였던 광주 제일고에 입학했을 때만도, 그의 인생은 순조롭게 펼쳐지는 듯 했다.
그러나 대학문에 들어서 세상과 마주본 뒤로 그의 행보는 크게 달라졌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물결이 전국을 뒤덮을 무렵, 그는 전남대 신입생이 됐다. 아들을 법학도로 키우려 했던 아버지의 뜻에 반해, 그는 토목공학과를 지원했다. “부모님은 아직도 법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한 줄 아십니다. 그때는 일차적으로 부모의 뜻에 순응하고 싶지 않았고, 보다 현실적인 학문에 임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물론 공대의 기계적인 커리큘럼에 질려 결국 법학과로 전과(轉科)를 했지만요.”
1960년대 말, 암울한 시대 속에서 그는 “일그러진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과 인생여정을 함께 했다”고 회고했다. 그 과정에서 3선개헌 반대와 교련 반대 등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게 됐고,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 광주분실에 체포 구금돼 제적을 당하기도 했다. 10년 만에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한 그를 세상이 쉽게 받아줄 리 없었다. 실력으로 취업이 됐다가도 신원조회에 밀려 퇴직을 당했고, 공무원시험과 같은 ‘국가고시’에는 아예 응시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광주에 있는 플라스틱 제조공장에 들어가 말단 사원으로 일했습니다. 창업 당시 연간매출액이 2억원에 머물렀던 기업이 10년 후 총무이사로 퇴임할 무렵에는 300억원으로 신장됐습니다. 이제 내 몫을 다했다 싶어 퇴임하고 재야정치계로 옮겨왔습니다. 그때가 1984년입니다.”
1983년 미국 체류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내 조직이었던 민주헌정연구회서 1984년부터 부대변인을 맡았다. 그 후 1988년 평화민주당 총무국장을 거쳐 1994년 민주당 정책연구실장 및 국회 정책연구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잡아함경〉 제48권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계율을 지켜라. 재물을 얻고자 한다면 보시를 행하라. 덕망이 높아지고자 한다면 진실한 삶을 살고, 좋은 벗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은혜를 베풀어라. 그러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100%는 어렵다 해도, 되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닮으면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1995년 광주 촌놈이 상경해 초대민선 성동구청장으로 당선되는 영광도, 그런 노력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문화와 생명, 환경과 인권을 모토로 10년째 성동구의 수장을 지내온 그는 취임 직후 어린이집과 도서관 짓기 사업에 몰두했다. 구내 20개동마다 어린이집을 짓겠다는 목표로, 지금까지 17곳을 달성했다. 또 성동구를 4개 권역으로 나눠 총 4개의 도서관을 만들 계획이다. “1년에 1000번은 구청장직을 그만두고 싶다”할 정도로 구민들의 민원과 이에 걸맞는 행정살림을 꾸리는 것에 대한 염증도 많다고 했다. “민원은 법이나 제도로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되는 ‘충돌’이기에, 이를 원만히 해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법을 공부했지만, 법이 현실을 앞서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앞선 행정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행정의 선진화와 대중화를 지향하는 그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직원들에게 가장 엄격한 ‘호랑이 청장님’이다. “저는 가끔 구내 동사무소를 방문합니다. 동사무소 직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고향의 부모님께 서울시 공무원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머리를 긁적거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동구청에 근무한다고 하겠죠?’ 동사무소 직원이 제 스스로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동사무소 서비스는 어떨까요? 바로 지금 여기 자기의 몸과 마음이 있는 곳이 ‘극락’이요, ‘극락’으로 기필코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 구청장은 또 “지역공무원이 철밥통이란 말도 옛 얘기”라며 지역행정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혁신 개혁 뭐 이런 이야기들이 난무한 현실입니다. 진정한 혁신은 자신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겠지요. 〈화엄경〉에 나오는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體唯心造) 구절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생각과 부처님 가르침이 이처럼 같을 수 있을까요? (웃음)”
일할 때는 엄하지만, 평상시엔 재치와 유머가 강해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고 구청장은, 성동구 청사를 지을 때도 지역민들을 위해 청사를 둘러싼 조깅트랙을 만들 정도로 민심을 우선시한다. “더불어 살면 서로 좋을텐데, 중랑천에 풀어준 오리새끼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어린시절 우리동네서 친구들과 닭서리를 많이 했던 업보인가?!” 넉넉한 웃음을 짓는 고 구청장은 오늘도 재래시장을 누비고, 선술집에 들러 구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귀를 활짝 열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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