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송 연극배우
‘이해랑賞’수상…40년 연극인생 만개
연기자의 길도 구도의 길처럼 치열…
‘지금 이자리에 최선’가르침에 충실
1981년 한국사회는 파계승 지산에 주목했다. 날카롭고 단단한 턱선, 한없이 깊고 맑은 눈매 그리고 산 정상에서 산 안개가 자욱한 산들을 바라보며 걸망을 추스르는 ‘한 스님’이다. 암울한 시대현실과 고뇌하는 자아를 가진 지산이 끝이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아 떠나는 모습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삶의 출구를 줬다. 무력(武力)으로 한국사회를 점령한 신군부에게는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화두를 던지는 듯 했다. 영화 ‘만다라’와 주인공 지산역의 전무송(64)이 40년간 연극, 영화 75편에서 온갖 중생의 모습을 연기한 공로로 제15회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상 수상자로 그가 선정된 이유는 간단했다. “40여년간 70여편의 연극을 통해 내면적이고 지적인 연기를 펼쳐왔다”는 것이다.
봄은 남산을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개나리 진달래 백목련에 화려한 불을 붙이고 있었다. 한참 신나게 물이 오르고 있는 봄, 남산길을 걷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걸망을 맨 ‘지산스님’이었다. 강단져 보이는 체구, 담백한 옷차림, 그리고 삶의 온갖 번뇌를 담아낸듯한 표정. 그러나 변한 것이 있었다. 구원을 찾아 ‘길없는 길’을 떠났던 번뇌하는 자가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극인 전무송이라는 것이다. ‘해탈’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연극을 통해 자신을 ‘구원’한 것처럼 미소를 띤 그의 얼굴에서는 관음보살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해 짧게 표현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40년 외길을 걸어오며 얻은 심득(心得)의 경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매우 자비스러웠으며 평온했다.
40년이 지났어도 영원한 현역인 전무송은 매우 바빴다. 대학로에서 그와 40년 연극 짝패로 함께 해온 이호재와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를 공연한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무송과의 만남은 남산 서울예술대학에서 가까스로 이루어졌다. 그가 서울예대를 택한 이유가 있다. 1962년 서울예대에 입학하면서 그의 ‘대리인생’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연극인으로서 최고의 정점에 오른 그가 연극에 처음 입문한 서울예대을 찾아 인터뷰를 하는 것은 마치 심우(心牛)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본체(本體)를 발견한 듯한 느낌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는 교정의 한 귀퉁이에 서있는 훤칠한 오동나무를 가리켰다. 그가 이곳에 입학할 때 그는 다짐했다. ‘저 나무가 쑥쑥 크는 것처럼 나도 자랄 것이다.’ 그 후 그는 40년간 태자 군인 변호사 교장선생님 신부 스님 등 수없이 많은 인생들의 삶을 대신 살았다.
“어려울 때면 늘 저 오동나무를 보러왔습니다. 저놈은 천둥치고 바람불고 눈와도 잘 크는데 난 왜 이러나. 참 답답할때가 많았죠. 결국 파계승 지산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고향은 인천이다. 운동하고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그는 초등학교때는 야구선수였고 고등학교땐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배웠다. 그와 연극과의 만남은 순전히 영화 때문이었다. 인천공고시절 책가방에 사복을 넣고 다니며 인천 신포동 극장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거칠 것 없이 몽환의 세계를 동경했던 그 시절 그에게는 알게 모르게 배우의 꿈이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꿈으로만 머물게 했던 그를 연극에 미치게 했다. 당시 김동원이 주연을 했던 연극 ‘햄릿’을 관람한 순간 전 생애를 관통할 만한 짜릿한 충격이 다가왔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대학을 가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1962년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현 서울예대)에 1기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막연한 ‘동경’으로 출발한 그 길이 그에겐 ‘광명’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삶이란 끝없는 공부의 연속 아닙니까. 수행자가 ‘도’(道)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행하는 것처럼 참으로 고통스러운 공부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눈물 절망 배고픔 죽음 등 모든 것을 겪었다. 가난한 가장 때문에 남대문에서 옷감장사를 하는 아내, 그리고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마음의 빚’만 자꾸 늘어갔다. 그런 그에게 희망을 던진 것은 임권택과 함께한 영화 ‘만다라’다. 그는 만다라를 통해 대종상 남우조연상과 신인상을 한꺼번에 거머쥐며 대중들앞에 확실한 연극인이자 영화인으로 자리 잡았다. 만다라는 또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가끔 절에 다녔던 얼치기 불자에서 “자신을 깨우친” 제대로된 불자로 거듭나게 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며 아끼는 그의 불명은 다정(茶亭)이다. 1970년대 말 서울 경국사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은 것이다. 무명이었던 국립극단시절 그는 경국사를 자주 찾았다. 그는 지관스님으로부터 감로수와 같은 불교의 이치를 받아들였다. 객승이 거처하는 요사채에 머물며 차와 불교와 인생에 대해 조금씩 깨달아 간 것이다. 경국사와 지관스님과의 인연은 결국 ‘만다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그는 나중에 알게 됐다고 술회했다.
“큰스님께선 만다라를 보시고는 ‘우리 절에 있는 스님보다 처사가 더 스님 같아’라고 말씀하셨죠. 텔레비전의 원효대사를 보시곤 ‘어허 우리 절에 원효대사님 오셨네’라며 다독거려주셨습니다. 그때 공부가 큰 행운이었고 지금껏 삶의 밑천이 됐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전무송이란 이름은 이제 단순한 개인의 이름을 넘어서 있다. 세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온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연극인 전무송’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요즘 또 하나의 수식어가 붙고 있다. ‘전무송 연극패밀리’가 그것이다. 그의 성격과 연기를 쏙 빼닮은 딸 현아는 배우이자 극작가이자 연출가다. 아들 진우 역시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남은 생은 덤 아닙니까? 느낌과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나와 남이 다른 것이 아닌 배역을 자유롭게 소화하고 싶습니다. 마치 삼라만상이 하나의 인연에 얽혀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무송에게 이해랑 문학상은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한다. 봄 연인을 기다리는 설레임처럼 자신을 첫 출발선에 선 듯 두근거리게 하기 때문이다. “환갑으로 한바퀴 돌았으니 다시 원점 아닙니까. 시작도 끝도 없는 삶이지만 부처님과 선사님들의 가르침처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늘 활발발하게 초심으로 충실할 겁니다.”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급하게 자리를 떴다.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는 후배연극인들의 연극을 보러가기 위해서다. 우리는 어떻게 밥을 먹을 것인가, 어떻게 길을 걸을 것인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편지쓰고 어떻게 웃고 어떻게 먼 들판까지 걸어갈 것인가를 매일 생각하며 산다. 햇살 맑고 투명한 봄날 오후 ‘마음의 부처’를 찾아 중생들에게 전해주는 전무송의 어깨위로 쏟아지는 봄 꽃무리는 난해하기만 한 생의 순간들을 따스하게 한다.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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