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 경희대 명예교수
한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 물었다. “부처님, 무엇을 보시해야 모든 것을 보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중생에게 가르쳐주면 가장 훌륭한 보시라 할 것이다.〈잡아함경 제 36권 中〉” ‘중생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보시는 쉽지 않다. 46년간 ‘피아노맨’으로 살아온 경희대 전 음악대학장 황선(66) 교수가 조계종 역사문화기념관에 보시한 ‘피아노’는, 그녀가 전 생애를 건 ‘진리의 결정체’나 다름없다. 그녀로선 최상의 보시인 셈이다. 황 교수는 왜 피아노를 기증했냐는 물음에 다른 말로 답했다. “기념관 1층 한켠에 있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를 한낱 악기로만 보시지 마세요. 그 말없는 피아노에 천년 만년의 법음(法音)이 담겨지길 발원합니다.”
제인 캠피온이 만든 영화 ‘피아노’에서, 피아노와 함께 바다 깊숙이 빠져드는 주인공 ‘아다’의 독백은 유명하다. “소리가 존재할 수 없는 고요, 바다 깊은 차가운 무덤 속으로…” 황 교수는 ‘고요한’ 역사기념관에 부처님 곁에서 영원한 도반이 될 ‘소리’ 하나를 소리없이 모셨다. 아무도 모르게. 아직 피아노의 뚜껑이 열리지 않았고, 당분간 그 피아노를 통한 음악회 예정도 없다. 하지만 그녀와 하나가 된 피아노를 조계종의 산실이나 다름없는 총무원에 보시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날마다 흐뭇한 여자다.
지난 1일 오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 바로 아랫마을에 자리한 황 교수의 집 담장밖에서도 귀익은 피아노 가락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하늘거리는 봄바람에 꽃내음 아련한데, 피아노 소리는 정원의 소나무 가지마저 박자를 맞춘다. 피아노의 선율서 빠져나와 피아니스트의 손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울퉁둘퉁한 손마디며, 손뼈가 앙상한 모양새가 평생 피아노와 하나됨을 보여준다. “40년이 넘었으면, 이제 지긋지긋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무슨소리! 피아노를 하루라도 거르면 화장실을 가지 않은 것마냥 온몸이 뒤틀리고 정신이 산만해진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한 곡 멋들어지게 치고 나면 온몸이 날아갈 듯 활기를 되찾거든요. 보통사람은 이해하게 어렵지요.” 그녀는 성악가가 목을 쉬지 않고 쓴다면 몸을 버리기 일쑤지만, 피아니스트는 정진하듯 꾸준히 ‘수행’해야 정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구도자의 그것과도 흡사할 것이라고 비유했다.
광주에서 다섯딸 중 넷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1959년 서울 동대문 회기동에 있는 경희대학 음악학과에 입학해 서울로 상경했다. ‘피아노 한대 덜렁 짊어지고’ 서울로 온 그녀는 ‘꽃밭의 공주’와 같은 대학생활이었다고 회고했다. 피아노 가정교사로 일하면 레슨비도 짭짤했고, 캠퍼스에서도 뭇 남학생들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덕에, 다른 형제들도 ‘아들처럼 키우려는 아버지의 의지로’ 각자의 전문영역을 갖고 학업에 매진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으레 미국이나 유럽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 하는 것이 당시의 상례였지만,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26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대학강단에 서는 행운을 얻었다. 국내 대학 음악당 중 4800석의 대규모를 자랑하는 경희대 ‘평화의 전당’ 극장장을 거쳐, 음악연구소 초대소장, 음악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스무살 풋내나는 시골처녀로 경희대학에 몸담은 뒤, 40년이 넘도록 피아노와 씨름하고 인재양성의 외길을 걸어왔다. 지난 3월23일 음대 학장직을 끝으로 46년만에 정년퇴임식을 가진 그녀다. “반평생 피아노와 함께해온 경희인생 40여년은 제게 가시밭길이자, 꽃밭이었습니다. 이제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속세의 욕심도 놓은채 하심을 실천할 수 있는 제2의 인생을 꾸리려고 합니다. 평생 받기만 했던 인생을 모든 이들에게 나눠주면서 회향할 생각입니다.” 수십명의 제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줬던 퇴임식날, 황 교수는 아쉬움의 눈물보다 희망의 웃음을 선사해서 제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서양음악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녀가 불교에 심취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천주교 집안에, (서양음악 관련) 주변사람들 다수가 기독교와 인연이 많았던 탓에 불교를 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4년전 대원사서 연꽃 보고
불서 탐독하며 불교 접해
지난해 부처님오신날
‘백혈병 어린이 돕기’
자선음악회 열며 포교 활동
2001년께 어느 봄날 광주독창회 초대로 제자들과 함께 남도를 여행하다, 우연히 보성 대원사를 찾았던 황 교수. 경내 곳곳에 만발한 연꽃을 보면서 ‘저토록 아름다운 꽃이 있었다니’ 하며 감탄을 자아냈고, 자신도 모르게 법당에 들어가 기도삼배를 올렸던 그녀다. 교수가 법당서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일행이 한참동안 찾아다니다 결국 버스로 돌아갔고, 일행을 30분이 넘도록 기다리게 만든 해프닝도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종교로서 불교에 귀의하기 앞서, 각종 불서(佛書)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불교에는 뭔가 심오한 참뜻이 숨어있다고들 하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생애를 찾아보고, 불교학 관련 논문들을 섭렵하기도 했습니다. 조사어록이며 큰스님 법문들도 두루 접하면서, 편안한 귀의처를 결정한 것처럼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황 교수가 불교에 매료되면서 친 첫 ‘사고’는 지난해 5월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세종문화회관서 개최한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자선음악회’다. 서양음악의 굴레에서 낯선 종교로 여겨지는 불교축제를 연다는 학장님의 결정에 처음엔 제자들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모든 종교활동은 인간을 구원하는 실천이며, 그것이 참사랑’이라는 스승의 말에 등을 돌리는 이는 없었다.
황 교수는 이제 일주일에 한두번 모교인 경희대를 찾아가 명예교수로서 다시 후학을 양성한다. 2년여의 기간이 지나면 경희대는 이제 그녀에겐 추억의 무대로 사라지고 만다. “2년간의 강단을 정리하고, 새 인생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캄보디아의 고아원을 물색중입니다. 배가 고프고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을 향해 교육열을 불태우고 싶어요. 다 자란 두 아들이 있지만 입양을 해서 다시한번 부모같은 심정으로 아이를 키울 계획입니다. 구업(口業)을 짓는 것도 악업이니 실천하기 전에 구상하는 이야기는 그만 할께요.(웃음)”
성북동 집을 나서 삼청터널을 지나 북한산 성곽에 다녀오면 1시간30분이 걸린다는 그녀는 요즘 날마다 그 코스로 산책을 한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면서 인생의 이모저모를 끄집어내어, 참회하고 잊어버리고, 용서하는 마음을 배운다고 한다. “참 이상하죠? 땅에서 산으로 산으로 올라갈수록 부처님이 된 듯 용서하는 마음이 샘솟다가도, 막상 다시 땅으로 내려오면 삿된 욕심이 불쑥 튀어나오니 말입니다. 사찰이 산에 있고 스님이 산에 계시는 뜻도 그런가요?” 세상만사 다 겪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나이 지긋한 노년의 황 교수는, 정원에 새로 핀 봄꽃눈을 발견하고 이것 보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는 모습이 풋풋한 소녀와 같다. 그녀의 이름처럼 선(善)한 행복을 예견하듯 싱그러운 얼굴이다.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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