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수/화가
마음밭의 잡초 뽑아내니 환희심이…
동막골에도 봄이 왔다. 진달래 꽃망울이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름을 보면 알 수 있다. 밭으로 나서는 촌로들의 발걸음도 분주하다. 봄을 기다렸던 발걸음이다. 저수지 위를 날아오르는 백로의 날갯짓이 가볍고 경쾌하다. 얼음이 녹은 저수지 위에 동심원이 인다. 봄도 그렇게 내 마음에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이곳 안성의 동막골에 둥지를 튼 지 3년. 서울에서 생활했던 번잡한 마음을 접기가 쉽지는 않았다. 수많은 도반과 제자, 가족과 형제들을 등지고 작은 ‘은둔’을 택하기까지 고충도 있었다. 동막골에 이사와서 처음 한 일은 낡은 집에 정성을 쏟는 것이었다. 벽에 황토를 발라 허물어지고 틈이 벌어진 곳들을 막았다. 내 마음과 내 손길이 일체가 되어 마침내 나의 둥지가 내가 되고 내가 바로 집이 된 듯 했다. 문틈새로 새어 들어올 겨울 찬바람을 막기 위해서였다. 돌 축을 쌓아 봉당도 만들어 고무신을 말끔히 닦아 세워 놓았다. 산에 올라가 싸리나무를 베어 며칠을 두고 울타리도 세웠다. 아늑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낮에는 집을 짓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번잡했던 마음이 차츰 안정되어 갔다. 벌어졌던 마음의 틈새가 메워지고 허물어진 마음의 축이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봉당 위 댓돌위에 놓인 신발을 신을 때마다 전날밤 신발을 닦던 마음으로 정갈함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 어느 것 하나 내 마음 아닌 것이 없다.
텃밭을 일구었다. 상추와 쑥갓, 오이와 호박 씨앗을 심고 가물면 물을 주고 풀을 뽑아주었다. 날마다 눈에 보이도록 자라는 것들에게 감사하는 날들이 잦아졌다. 그들은 끼니마다 밥상에 올라와 입맛을 나게 하고 건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물었던 마음에 단비가 내리고 무성했던 마음 밭의 잡초를 뽑아낸 덕택이다. 무수한 생명의 재잘거림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있음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뒤란에도 상사화가 무수히 올라오고 철 이른 야생화는 벌써 보랏빛 꽃을 피웠다. 올해도 이곳 내 작은 뒤란에서는 많은 꽃들이 피고 질 것이다. 씨를 뿌리고 가꾸지 않아도 나름대로 자리 잡고 꽃을 피우는 모습들이 어찌나 고운지 경이롭기 그지없다. 그 환희심 속에서 나는 문득 해도 해도 모자를 ‘수행’이 하고만 싶어진다. 삶의 수행, 마음의 수행이란 것이 구도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해도 상관없다. 생명의 깨우침 속에서 스스로 닦아나가는 일이 나의 소박한 일상이다.
사계절을 이곳에서 지내면서 나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또한 언제나 변함이 없는 그들의 순리에 따라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한다. 생로병사의 순차적인 과정은 있으나 또한 그대로인 본래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임을 깨닫기 위한 고행을 시작한 것이다.
나의 그림은 내 고행(苦行)의 표현이다. 그러기에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바람이 있고 꽃이 있고 또한 내가 있다. 영원히 죽지 않음 앞에서 부귀영화란 부질없음을 알 때까지, 산란한 마음 장난에 추던 춤이 멈출 때까지 나의 고행은 계속될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꽃은 피듯이 애써 내 영화로운 삶을 기다리지 않겠다. 그림에 표현된 것들에게 진실과 감동을 찾지 않겠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진실될 때 감동은 오겠지만 굳이 그것조차도 감동이라 말하지 않을 때까지 나는 붓을 놓을 수 없다.
오래 갈무리해둔 것들에서 깊은 맛이 나듯, 내 삶을 이곳 동막골에 오래도록 갈무리해두고 싶다.
겨우내 기다리던 봄이 왔다. 들녘에 하나 둘 농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새로 갈아엎은 흙빛이 신선하다. 올 봄 나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마음 밭을 일구기 위해 붓을 들었다. 동막골에 심은 마음 텃밭에 무엇이 심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내 고행이자 수행의 결과일 뿐이다.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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