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선 강원도지사
“불제자로서 ‘자리이타 공직자’ 돼야죠”
한일수교 협상문제로 전국이 들끓었던 1964년 6월3일, 강원도 삼척의 북평고교 3학년생 김진선군은 6.3사태에 가담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쳤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사단병력을 투입, 시위를 진정시켰다. 강원도 산골짜기의 소년 김 군은 그로부터 며칠 후 교문 앞 ‘검문’에서 협정반대 서명서류가 적발되는 바람에 학교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열여덟살 청년은 남은 고교시절을 집에서 보내야 했다. 그토록 바랐던 육사진학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강원도의 사령탑이 된 김진선(金振先先, 60) 강원도지사는 40여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올곧은 한일관계를 위해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지난 3월28일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돗토리현(鳥取縣) 지사의 발언을 듣고, 10년간 자매결연관계였던 일본 돗토리현과의 교류협력사업 무기중단을 선언한 것도 그 예다. 29일 강원도 춘천에 있는 강원도청 2층 지사실에서 그를 만났다.
강원도 저소득층 주민 위한
‘We Start’ 복지마을 건립…
어릴때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두타산 삼화사 항상 그리워
일본. 사정이야 어찌됐던 일본은 김 지사와 뗄 수 없는 나라다. 고등시절 학교생활을 중단시켰고, 육사의 꿈을 앗아갔다. 일제가 청산된 해방 이듬해에 태어났건만, 일본은 언제나 인식하고 살펴야 할 대상이었다. 한학자였던 조부를 빼닮은 김 지사는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단발령과 창씨개명을 거부하셨고, 3.1독립 운동 이후 일본이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북산면 면장을 제의했지만 거절하시고 두타산에 들어가 칩거를 하셨지요. 물론 그 덕분에 후손들이 물려받은 유산은 ‘가난’이었지만요.”
1950년대 배곯고 가난하지 않았던 자가 있을까. 김 지사의 어린시절 역시 지독한 가난으로 얼룩졌다. 시집 오자마자 지병을 얻어 평생 자리에 누워 살았던 모친, 고사리손으로 성냥을 붙여 묵호의 공장에 넘기고 푼돈을 벌었던 중학시절, 그 돈으로 읍에 가서 밀기울(밀 찌꺼기)을 사들고 좋아하실 어머니를 상상하며 집으로 달려왔던 그때 그시절… “안타까움과 절망의 나날들이었지요. 약첩은 커녕 흰쌀밥 한번 제대로 드시지 못하고 눈을 감으신 어머니, 어머니 생각만 하면 지금도 죄책감에 고개를 숙입니다. 가슴속이 문드러지듯 아프게 저며옵니다.” 4남매와 병든 아내를 위해 손에 잡히는대로 일거리를 수행해 온 아버지를 보며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못꿨던 그에게 희망의 불빛이 비치기도 했다. 전교 1등 자리를 유지했던 그가 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 여교사가 한달 월급을 몽땅 털어 입학금을 지원한 것이다. 입학등록금 2,851원을 가져온 선생님을 보면서 가슴으로 삼켰던 눈물과 무슨일이 있어도 성공하리라는 강한 집념을, 김 지사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 후 밤을 꼬박 새며 교과서를 줄줄 외듯 공부에 임했다. 남들은 좋은 책도 사서 보고 참고서적도 많이 있지만, 그에겐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허름한 교과서가 전부였다. 수업시간에는 칠판이 뚫어지도록 집중했다.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형과 함께 해가 질때까지 허리가 끊어지도록 김을 매고 보리타작을 했다. 농사 짓느라 몸에 배인 분뇨냄새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도 당했다. “아버지는 땅 한평 없는 가난한 소작농으로 사셨지만 병든 어머니를 수발하시며 우리 4남매를 반듯하게 키우려 애쓰셨습니다. 공부도 중요하고 출세도 좋지만 늘 ‘사람은 경우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공부에 집안일에 농사일에 몸이 열개라도 부족했던 김 지사는 지쳐 쓰러질 듯 너무 힘들때면 동해 삼화사를 찾아갔다. 할아버지와 함께 자주 찾았던 두타산이 좋았고, 그 산에 넉넉하게 자리잡은 삼화사를 보면 힘이 샘솟았다. “우리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신봉했습니다. 삼화사는 종교성지로서의 가치 이상으로 언제나 넉넉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와 같았고, 편안하게 감싸주는 벗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경내를 거닐면서 힘들고 지친 심신을 재충전했다고나 할까요?”
그가 본격적으로 불교에 눈을 뜬 것은 동국대 행정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탄허스님이 강의하는 ‘불교학개론’을 듣고 참선도 익힐 수 있었다. 불교를 학문적으로 접하고 수행을 체험하긴 했지만 ‘불교를 머리로만 배우고 마음속으로 터득하진 못했다’고 김 지사는 회고했다. 불교를 배우면서도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대학생활 중 우연히 불교를 접했을 뿐, 기독교를 종교로 삼았다. 교회성가단원으로까지 활동할 정도로 기독교를 신봉했던 그는 결혼 후 부인의 권유로 불교에 귀의했다. 1980년대 초 서울 불광동에서 결혼살림을 시작했던 김 지사는 인근에 있는 수국사와 진관사를 다니면서 ‘불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했다. 김 지사 부부는 법당에서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주로 참선을 했다.
“종교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는 보약이기에, 모든 종교는 하나의 길로 통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찰을 찾았을때 밀려오는 편안함은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지요. 그 옛날 내 고향에서 맛봤던 삼화사의 푸근한 숨결을 사찰 어디를 가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김 지사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맑은 가난’과 아버지가 강조한 ‘인간다운 삶’,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을 실천하면서 150만명에 달하는 강원도민과 함께 살고 있다. 그가 지난 6일 저소득층에 교육 건강 복지 등을 종합 서비스하는 민간 주도 최초 복지사업 ‘We Start’마을 건립에 나선 이유도 자비행 이타행의 실천방식이다. 함경도 출신 피난민들로 가난을 대물림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속초 아바이 마을이나 석탄산업합리화로 인해 영세마을로 전락한 정선 함백마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린 철원 화지.월하 마을 등에 자비의 손길을 펼 계획이다. 자랑스런 강원여성상, 평등문화상 등을 제정하고 한국여성수련원 건립 등 총 129개 여성정책사업에 600억 상당의 예산을 투입할 정도로 양성평등정책도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김 지사는 지금도 길거리서 지나가는 할머니를 볼때마다 어머니를 그리는 버릇이 있다. 손을 잡으면 꼭 어머니의 손길처럼 따스하고, 가슴을 껴안으면 어머니의 냄새가 날 것 같다고 했다. 병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밀찌꺼기를 사이에 놓고 어머니와 함께 나눠먹었던 어린시절로, 가끔은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잘 먹이지도 못했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고 엄마노릇도 제대로 못했다’고 미안해할 어머니. 하지만 그 어려운 삶을 지탱해온 아들이 삼척 북평의 스러져가는 초가집서 세상밖으로 나와, 이제 강원도 최고 지도자가 됐다. 아들은 ‘아이처럼’ 엄마 앞에서 이렇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듯, 아쉽고 서운한 표정을 계속 감추지 못했다.
춘천=하정은 기자 jung75@ibulgyo.com
- 김 지사와 오현스님의 인연
스님이 주신 ‘염주’ 보물 1호
김 지사는 속초 신흥사 회주 오현스님의 유발상좌(출가하지 않은 세속의 제자)다. 김 지사가 오현스님의 신망을 얻고, 김 지사 또한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까지는 깊은 인연의 고리가 있었다. 1970년대 강원도청 지역개발계장을 맡았던 김 지사는 당시 설악동 개발사업을 맡아 추진하는 실무자였다. 신흥사 주지를 맡았던 오현스님은 신흥사 인근의 공원조성에 대한 반대입장이었고, 김 지사는 날마다 신흥사를 찾아가 스님을 설득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던 끝에 말다툼도 잦았고, 승속지간을 떠나 크게 싸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대 총각이었던 제가 스님께 예의없이 굴기도 했고, 스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따져묻기도 하는 등 충돌이 많았었지요. 하지만 싸우면서 정이 든다고, 스님은 불같은 성을 내시다가도 언제나 진중하게 제 의견을 들어주시고, 끝내 제가 원하는 바대로 이끌어주셨던 장본인이셨습니다.”
스님이 쓴 시 ‘심우도’를 읽고 스님을 좋아했고, 일상생활속에서 진리를 얻고 터득하고 설파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에 존경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지사가 청소년기 이후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도 만해 한용운이다. 그가 매년 8월 무슨일이 있어도 모든 스케줄을 다 미루고 참석하는 행사가 백담사 만해축전이다.
“암울한 시대에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치열하게 부딪히며 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끝까지 잃지 않는 정신을 존경합니다. 백담사에 올라 오현스님을 친견하면 저는 그분이 바로 오늘날의 만해스님 아닌가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김 지사의 집무실 책상서랍에 20여년이 넘도록 간직돼 있는 ‘보물 제1호’는 스님이 준 ‘벼락맞은 대추나무 염주’다. 세월의 떼와 손떼가 묻어있는 그 염주를 김 지사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했다.
- 김 지사는 누구…
중앙신도회 지도위원 활동
1946년 강원 동해서 태어나 북평중고를 졸업, 동국대 법정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군복무시절 월남전 참전에 지원했고 1974년 제15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 이듬해 강원도 홍천군 수습행정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영월군수, 강릉시장(1991년), 경기 부천시장(1994년)을 거쳐 1998년 제32대 강원도지사로 부임, 2002년 재임됐다. 한국사진작가협회에 몸담을 정도로 사진에도 조예가 깊고, 현재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회원 및 조계종 중앙신도회 지도위원직을 맡고 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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