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스님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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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교의 청사진(19)
나고 죽는 것은 인생의 두 가지 큰 사건이다. 불법의 관점에서 보면 태어났다고 기뻐할 것도 아니고, 죽었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다. 용감하게 마주하면 된다. 그러므로 친한 친구가 왕생했다면 엄숙하고 정중한 마음으로 문상하고, 기뻐할 일이 생기면 달려가 축하해주는 것이 예의이다.
기쁜 일에는 복을 빌어주고, 경사스런 일에는 축하를 한다. 『주례周禮』 「추관秋官·대행인大行人」에서는 “경사를 하례함으로써 제후의 기쁨을 돕는다”라고 했다. 오늘날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모두 다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풍습이 있다. 예를 들어 결혼과 득남, 웃어른 생신에서부터 저택 신축, 신간 출판, 대학 합격, 승진 등 모두 축하할 만한 기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쁘고 경축할 일이라도 간소하면서 엄숙하게 치르고, 허례허식으로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참가하는 사람도 다음 사항을 유념해 예의를 지킨다면 더욱 경사스러울 것이다.

(1) .가정에 경사가 있으면 날짜, 시간, 장소를 정해 가까운 친척과 친구를 초대한다. 하지만 남길 정도로 많은 음식이나 살생은 피해야 하며, 향이 강한 채소와 비린내 나는 고기로 손님을 접대하지 않아야 한다.
(2) ..가까운 친구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직접 참석해 축하하거나 축하카드 또는 전화로 축복해준다.
(3) .축하인사를 건넬 때는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 도착한다. 너무 늦거나 지나치게 일찍 나오는 것은 피해야 한다.
(4) .축하 내용에 맞게 의상을 갖춰 입고, 언행 또한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5) .하례선물을 선택할 때는 불교서적이나 염주 등 그 의미나 사용가치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나고 죽는 것은 인생의 큰 두 가지 과제이다. 선종에서는 ‘삶과 죽음이 밝지 못하니, 마치 제 부모가 죽은 듯 슬퍼한다’라고 이야기한다. 나고 죽음(生死)은 인생의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일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는 풀기 힘든 수수께끼와 같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수수께끼에 담긴 진리를 풀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교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과 ‘사’, 이 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오늘날 인간불교가 할 일이다. 생生은 기르고 가르치는 것이며, 사死는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중국의 혼례나 장례 풍습은 지방마다 서로 다르다. 그런데도 모두 고치려 하지 않는다. 사실 수많은 풍습은 모두 인위적이다. 지리, 풍수, 길일 등은 모두 미신이다. 여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길일을 택해 이 날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며, 날짜가 안 좋으면 길하지 않다고 퇴짜를 놓는다.
세상에 꼭 그날이어야 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타이완이 낮이면 미국은 한밤중이다. 또 지리적으로 반드시 동쪽을 바라봐야 된다거나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고 한다. 사실 허공에는 방위가 없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면 상대방의 오른쪽이 나의 왼쪽이고, 나의 전방이 상대방의 후방이 되는데 어디가 좌左고 어디가 우右란 말인가! 또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란 말인가!
『선생경善生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선재동자에게 방위에 예배禮拜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방위는 우리 마음속에 있지, 허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해야 하는 방향으로 부모는 동쪽, 스승은 남쪽, 친구는 북쪽, 동복(童僕: 사내 중)은 아래쪽, 사문은 위쪽으로 삼는다.
허공은 일단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 방위가 아니다. 끝없는 시공 가운데 우리들의 진실한 생명이 머물지 않는 곳은 없다. 자신의 진여자성을 깨닫고 직접 체득하면 당신의 본심은 허공에 가득차고 법계에 꽉 차며 시방세계에 걸쳐 있고 삼세에 통해 있어 무한한 시공과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방위는 허공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존재한다.
사람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해서는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억측하여 말을 만들고, 심지어 그것에 미혹되어 믿어버림으로써 신권神權에게 조종당하기 쉽다. 불교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은 누구나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스스로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지리, 풍수도 물론 나름대로의 원리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시간과 지리에 집착하는 것을 반대함은 물론, 맹신하지 말고 신권의 조종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시간을 맹신하고 지리에 집착하지 않아도 불교의 ‘날마다 좋은 날이고 곳곳마다 좋은 곳이다’라는 말처럼 마음만 좋게 가지면 어느 때, 어디서나 항상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성된 마음이 허례허식보다 중요하다.

17. 자연관自然觀 : 환보지도環保之道

‘자연’은 세간의 실제 모습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순환하고, 중생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안에서 윤회하고, 마음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면서(生住異滅) 변화하고, 물질이 생성되고 머물고 파괴되고 사라지면서(成住壞空) 변화하는 것 등이 모두 자연이다.
자연은 일종의 법칙이다. 자연은 일부러 애쓰지 않고 꾸며 만들어 내지 않는다. 무릇 이치에 합당한 도리라면 모두 자연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았던 우주의 진리인 ‘연기성공緣起性空’은 사실 우주의 ‘자연’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은 하나의 ‘원圓’과 같다. 좋은 인연은 선한 과보를 가져오고, 나쁜 원인은 악한 과보를 초래한다. 인과는 처음과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진다. ‘인과업보’는 불교의 진리이다. 부처님은 우주 진리를 깨달은 자이며, 부처님께서 밝힌 교의 또한 자연계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참된 이치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법이여시(法爾如是: 있는 그대로)’ 역시 자연스럽고 본연의 모습 그대로이며,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불교는 줄곧 자연을 추구해 왔으며, 인심과 인성을 중시해 왔다. 예를 들어보자. 부처님은 환희에 차 지극히 고요한 숲에서 천천히 경행을 하셨고, 조용한 자연 가운데에서 깊은 명상에 잠기곤 하셨다. 아난존자는 숲에서 습정(習定: 미세한 명상 상태)에 들 때 면란(面然: 얼굴이 활활 타고 있어 ‘면란’이라 부른다)이란 아귀를 보고 구해주고 싶다는 공空의 이치를 깨달았다. 또한 선종의 조사들은 자연생활을 숭상했다. 숲 또는 물가에 살며 말과 마차의 시끄러운 소리를 멀리하고 속세의 혼탁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사상적으로 거리낌이 없이 자유롭게, 세속을 벗어난 듯 자유롭게,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유유자적하였으니 이것은 정신적인 자연이다.
‘자연’은 즉 조화이다. 부자연스러우면 분란을 초래하게 된다. 어느 고덕古德 스님의 “어긋남과 순종함이 서로 다투면 이는 마음의 병이 되나니......”라는 말씀처럼,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교만, 질투 등이 마음호수(心湖)를 뒤집어놓으면 인간에게는 번뇌와 근심이 생겨난다.
불교에서는 ‘연기연멸緣起緣滅’에 따라 자연스럽게 순응하라고 가르친다. 불교의 수행자는 생활 속에서 있고 없고, 귀하고 가난하고, 좋고 나쁘고, 얻고 잃고 등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부처님의 “인연이 있어 세상에 나셨고, 인연이 다해 입멸하셨네. 오는 것도 중생을 위해 온 것이고, 가는 것도 중생을 위해 가시네!”라는 게송처럼 모든 것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에 순응하면 번뇌와 고통 가운데 머물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심이라는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다.
불교는 환경보호 의식이 깊은 종교이다. 내적으로 마음의 환경보호는 물론 외적으로 생태계의 균형까지도 중시한다. 산림, 계곡, 생태, 동물 등의 보호에 관심이 많다. 환경보호를 가장 잘 실천하는 곳이 바로 불교의 서방극락세계이다. 아미타불은 환경보호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바닥이 황금으로 덮여 있고, 7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탑과 일곱 겹의 난간이 지극히 장엄하며 청정하다. 공기오염과 수질오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소음, 독가스, 폭력, 원자력 등의 공해도 없다. 그 안에 사는 사람은 옷을 생각하면 옷을 얻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을 얻는다. 모두가 자연적인 생활 속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이다. 자연에 순응해야만 우리의 마음은 해탈을 얻고, 우리의 생명은 자유로울 수 있다.
자연이란 천天·지地·인人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사람은 대자연 안의 사람과 일과 사물과 환경 등과 대립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갖가지 고통이 생긴다. 세간의 사물이 자연과 합해지면 생명이 생기고, 자연과 합해지면 성장하고, 자연과 합해지면 모습이 만들어질 수 있고, 자연과 합해지면 선함과 아름다움이 생긴다. 모든 생명은 자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생명 역시 자연의 일부분이다.
자연의 생명력은 생사윤회의 법칙에 따라 순환하는 것이지, 좋은지 아닌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먹어야 할 때 먹고, 자야 할 때 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주大珠 혜해慧海 선사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약산藥山 유엄惟儼 선사는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안에 있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이로써 ‘도道’는 자연과 함께 하며, 자연적인 생활이 ‘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이신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웃어야 하나 웃지 않고, 마땅히 기뻐해야 하나 기뻐하지 않고, 마땅히 자비로워야 하나 자비롭지 않고, 마땅히 말해야 하나 말하지 않고, 선한 말을 들으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을 일컬어 ‘오종비인五種非人’이라고 하셨다. 그들의 행위가 자연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일종의 조화이다. 자연 또한 조화롭도록 힘써 노력해야 한다. 대자연의 강과 바다 역시 노력해야 힘차게 흘러갈 수 있다. 호수도 맑고 깨끗해야만 투명할 수 있고, 그 맑고 깨끗함이 바로 자연이다. 산이 안정적이어야 무너지지 않고, 나무는 뿌리가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자연에 순응해야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세간의 만물 중에는 빛깔이 화려한 것도 있고, 또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것도 있다. 동물이 보호색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자연스런 반응이다. 낮에 활동하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밤에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동물도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도 있고, 땅이나 바다에서 노니는 것도 있다. 모두 대자연의 품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이다. 심지어 동물들의 잔인한 살생도 자연적인 것이다. 생존경쟁이란 말이 있다. 불교는 살생하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요구이지 타인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깨달은 사람과 아직도 저 깊은 곳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 반반씩 살고 있다. 이 또한 자연적인 진리이다.
자연계에서 꽃은 피면 아름답지만, 꽃이 시들면 흙속에 스며들면 꽃을 보호한다. 이것도 자연적인 순환이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고, 생성되고 머물고 파괴되고 사라지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하늘을 거스르는 일은 자연이 아니다. 사람이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이치를 터득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봄과 여름에는 열심히 논을 갈고, 가을에는 곡식을 거둬들여 양식을 쌓아놓는다면 엄동설한이 닥쳐온다 해도 자연히 두렵지 않다. 밝게 비춰줄 물건들을 낮에 미리 준비하면 어둠이 와도 자연히 두려울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