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의 상황은 불교계의 위세를 가름케하는 외형적 자료가 역설적으로 많다. 유학자들이 집권한 정치권력 탓에 불교의 비대함이 사회 쟁점이 된 배경에는 그런 수적 자료가 정치 공세에 동원됐기 때문이다.대규모 탄압의 빌미였던 시기의 자료는 “태종대 불교세가 고려말의 1/10 규모로 축소됐다”고 적었다.

그렇게 축소됐더라도 당시 조선불교의 규모와 사회 위상은 현대와 대비해도 결코 작지 않았다. 일단 조선초 불교탄압시책으로 사찰과 사원전 및 사원노비가 이전의 1/10로 축소된 상태에서 선교 양종에 소속 사찰이 9500여개이고, 스님은 공식집계가 10만5000여명이다. 특히 서울(한성)거주이며 양반 출신 스님이 수백명이고, <동사열전> 수록 고승 중 조선시대 고승은 183명이다.

불교사를 전공한 황인규 동국대 교수가 이를 총정리했다. 이중 비구니의 추적조사가 정교하다. 조선의 공주출신 비구니인 경혜공주(문종의 딸)와 왕후로서 출가한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 등을 정밀 조사했다. 다만 정순왕후(노산군 부인)는 폐빈이 된 후 출가하였기에 왕후로서 비구니가 됐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고려시대 신혜왕후 유씨와 대소서원부인 자매가 비구니로 출가했고, 법흥왕과 진흥왕의 왕비가 비구니로 출가한 사례가 있다.

황인규 동국대 교수 ‘조선불교’ 정밀 탐색

“고승들의 순교를 잊어선 안된다”

여기에 추가되는 왕실의 비구니 출가 족적은 비극의 산물이다. 경순공주(태조의 막내 딸)와 경혜공주는 정변으로 부군을 잃고 출가한 경우다. 경순공주는 태조가 정변으로 남편과 남동생을 잃은 딸을 직접 삭발염의하여 출가수행에 들게 했다. 이외 태종의 후궁 10여 명이 태종 사후 한꺼번에 출가하는 등 왕후.공주 및 왕실녀의 불교 신행과 비구니 출가는 조선후기까지 계속됐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재력있는 비구니들이 도량을 중창한 사례도 상당하다. 19세기말 금강산, 유점사, 표훈사, 마하연, 신계사 등에 거액을 헌납한 비구니 사득(四得)스님은 득도암과 홍수암의 창건주이기도 하다. 그 즈음 금강산 일대 42개 사찰에 비구 400여명과 비구니 50여명이 수행했으며, 장안사에는 120여 비구니가 수행한 기록이 있다.

저자 황 교수는 책에서 조선 건국 후 성리학 절대체제가 바로 수립되지 못하고 17세기 이후로 미루어지게 된 것은 고려말에 이어 조선초 불교계 고승들의 노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한다. 고려말 천축승인 지공의 수제자 나옹혜근스님이 양주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부흥을 도모하다가 순교한 사례도 이 근거이다.

더구나 나옹 선사의 불사에 동참했던 무학 대사는 조선 건국 후 왕사로 책봉됐고, 한양 천도시 인왕산을 중심으로 수도건설의 기획자로서 내4산(內四山)인 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의 둘레를 지키는 동쪽 청련사(靑蓮寺), 서쪽 백련사(白蓮寺), 남쪽 삼막사(三幕寺), 북쪽 승가사(僧伽寺) 등 4대 비보사찰을 지정했다. 여기에 관악산과 도성 주변의 자운암 개운사 일선사 등도 무학대사의 작품이란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조선조 고승들의 역할은 외적 요소를 강조하기보다 내적 전통 계승에 초점이 맞춰졌다. 선교 양종 본산체제로 전환시키며 판사급 고승들이 조선불교를 전개하였다. 명종대의 선교 양종 부흥기에 승과(僧科)의 실시로 서산휴정, 사명유정과 같은 고승 배출의 텃밭에서 조선후기 ‘산중불교 시대’의 만개가 열리게 된다.

책은 조선후기 불교의 재인식 계기를 불교계의 임진왜란 의승병 참여로 꼽았다. 승병들이 본격 참여한 평양성 전투에서부터, 영규 승병의 분전과 전몰, 벽제관전투 및 노원전투를 통해 한성 탈환작전, 이순신의 수군 승리에 수많은 의승 수군의 참여 등으로 전쟁 후 조선정부는 서산 대사 등의 공을 인정, 사당 형식인 밀양과 해남의 표충사, 갑사 표충원, 영변 보현사의 수충사 등을 세웠다.

이후 광해군은 중국에서 진신사리를 모셔와 어머니 공빈 김씨의 능침사찰인 남양주 봉인사에 모시는 등 조선불교 진흥의 새 전기를 싹틔웠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세계관과 서원 중심주의에서도 왕실의 능침사찰인 용주사 보광사 흥국사 등이 계속된 이유도 그렇게 설명됐다.

저자는 조선 불교의 정신 가운데 놓쳐서는 안될 것으로 순교 고승들의 희생을 꼽았다. 조선 초 행호 선사, 조선중기 허응보우 선사, 조선후기 환성지안 선사 등이 중요 사례다. 여기에 비구니의 활동이 기반이 돼 후기에 삼보종찰의 한국불교 틀이 갖춰졌다는 것이다.